물밖에선 손사래, 물밑에선 발장구
통상 국회의장 임기 완료는 정계 은퇴 수순으로 통한다. 전직 국회의장 대부분이 그랬다. 정 전 의장도 20대 총선에 불출마하며 이러한 길을 밟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날 창립식은 마치 대권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정치권에서 정 전 의장의 대권 출마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지난 26일 새한국의 비전 창립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정 전 의장은 지난 15대 국회부터 20년 동안 새누리당에 몸담아 왔지만 이날 창립식에는 같은 당 동료보다 야권 인사들이 더 많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축사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 등 야권 인사들이 했다. 그나마 참석한 여권 인사들조차 대부분 지난 총선에서 공천 탈락에 반발해 새누리당을 탈당했던 인물들이었다.
정 전 의장은 임기 내내 사사건건 청와대와 대립하며 당 주류의 눈 밖에 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대 국회 후반기 의장을 맡으며 국회법에 따라 새누리당을 탈당했던 정 전 의장은 임기가 끝난 후 20대 총선 과정을 비난하며 복당을 거부했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은 그런 정 전 의장의 행보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정 전 부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싱크탱크 창립은) 권력욕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지금 새누리당은 비상사태인데 몸을 던져서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줄 생각을 해야지 마치 남의 얘기하듯이 (새누리당을 비판하고 탈당)한다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정 전 의장이 창립한 새한국은 정파를 넘어서는 중도 정치세력을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참여한 인사들을 보면 새누리당 비박계나 무소속 의원들뿐 아니라 국민의당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김동철 국민의당 의원이 창립 멤버에 이름을 올렸고, 정대철 상임고문과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 후원회장인 최상용 교수가 싱크탱크 고문을 맡기로 했다.
이외에도 새누리당에서 더민주로 당적을 옮긴 진영 의원과 뉴라이트 운동의 브레인 역할을 했던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노무현정부 청와대 정책 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 등이 새한국에 참여했다.
새한국의 비전 창립식은 정의화 의장의 대권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특히 정 의장의 새누리당 동료보다 야권 인사들이 더 많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정치권 관심은 정 전 의장이 어떤 형태의 새로운 정치 결사체를 만드느냐에 쏠려 있다. 그중 하나가 창당 후 국민의당과 합당을 하면서 대선 경선에 나서는 시나리오다. 이와 관련,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최근 “호남을 지키며 외연을 확대하겠다”며 정 전 의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새한국 원장을 맡게 되는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도 이에 화답하듯 “국민의당과 연대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말했다.
정 전 의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중도세력의 ‘빅텐트론’을 언급하면서 10월 신당 창당을 시사했다. 정대철 국민의당 고문은 앞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 전 의장이 대선 도전의사를 밝히며 도움을 청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정 고문은 해당 인터뷰가 논란이 되자 “정 의장이 ‘꿈이 있다’고 얘기해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으로 알아들었다”고 해명했다.
정 전 의장은 창립식에서 정 고문 발언을 언급하며 “새한국 창립은 내년 대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힘을 보태려고 하는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대신 정 전 의장은 인사말을 통해 분권형 개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정 전 의장은 “내년 대선 출마자들이 취임 1년 내 대통령에 대한 권한 집중을 해소할 수 있는 이원집정부제로 개헌할 것을 공약하고, 정당들도 당파적 이해를 떠나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전 의장은 또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이제 역사적 소명을 다 했다. 개헌을 통해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고, 협치에 기반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꽃피워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정 전 의장이 차기 주자들에게 ‘분권형 개헌에 동의하면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일종의 러브콜을 보낸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현재 지지율로 볼 때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정 전 의장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유력 후보와 연대한 후 분권형 개헌을 한다면 정 전 의장도 대통령 부럽지 않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창립식이 끝난 후 <일요신문>은 아직 개소하지 않은 새한국 사무실을 방문해봤다. 새한국은 국회 앞 여의도 삼보호정 빌딩에 둥지를 틀었다. 일각에선 해당 사무실이 향후 선거 캠프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하지만 사무실은 40평 정도로 캠프를 꾸리기엔 좁아보였다. 건물 관리인은 “우리 건물에는 내가 아는 한 선거 캠프가 들어선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새한국의 한 관계자는 “정 전 의장은 퇴임 후 한 달가량 휴식을 취한 후 오는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