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돌 쉼없이 달리다 ‘’헐떡헐떡‘’
▲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세돌 9단(왼쪽)과 구리 9단이 대국 후 복기를 하고 있다. | ||
이세돌 9단이 2월 23~25일 강원도 인제군의 깊은 산속 백담사에서 열린 제13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3번기 제1, 2국에서 중국 구리 9단에게 거푸 불계패, 타이틀을 놓쳤다. 국내 바둑팬들이 조금 충격을 받았다. 0 대 2. 팬들의 예상을 완전히 배반한(?) 이변이었다.
직전에 있었던 농심배 대회에서는 중국의 창하오 9단과 구리 9단을 연파하면서 한국에 우승컵을 안겨 주었던 이세돌이었다. 그 기세는 질풍노도와 같았고 자유자재의 변환술은 신묘막측이었다. 창하오와 구리는 혼이 나간 채 일패도지했다. 그런 걸 보여 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농심배 때 감탄하는 것조차 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사람들이 LG배 연패를 보면서는 믿을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너무 허망했다. 두 판 다 괜찮은 바둑이었다. 시종 강경 일변도로 공격을 퍼붓다가 뒤집기에 걸려 역전패한 1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2국의 패배는 불가사의였다. 이세돌은 저 유명한 다케미야(武宮正樹)의 우주류를 방불케 하는 호쾌한 대세력작전으로 상대를 몰아붙였고 종반에 접어들면서는 큰 차이는 아니나 이기는 건 확실한 형국이었는데, 거기서 돌연 난조에 빠지며 또 다시 역전패했다.
패인은?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서 심리적 안정을 잃었다는 것이다. 컨디션 조절 실패의 원인은 아무래도 과도한 대국 아니겠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이세돌은 2월 17~19일 중국 상하이에서 농심배 두 판을 두고, 20일 귀국해 하루를 쉬고 22일 백담사에 도착해 23~25일 LG배 두 판을 두었다. 이번 2월만 바빴던 것이 아니라 이세돌의 평균 대국 스케줄이 이런 식이다. 대국은 타이틀 매치나 국제기전 같은 큰 승부가 많으며 지난번에도 얘기했듯 중국리그도 소화해야 한다.
게다가 이번 경우에는 한국기원과 사인이 잘 안 맞아 이세돌은 행사 관계자들과는 따로, 늦게 출발해 대국 당일인 23일 새벽 2시엔가 대국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니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 최고수들이 경연하는 국제대회인데 한국기원의 진행이 다소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고, 이세돌 9단 자신도 때로는 ‘개성’을 조금만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애정 어린 충고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야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것이니 길게 얘기할 게 없을 터.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다는 느낌이다.
요컨대 너무 빠르다. 대국 시간을 자꾸 줄이는 것, 대국 날짜를 촘촘히 정하는 것, 이런 걸 한 번쯤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시간을 줄이고 단기간에 결판을 내게 하는 것은 관객과 흥행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 말에 찬성하기 어렵다. 바둑과 ‘속도전’은 애초에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그렇다면 대국 시간을 줄여 관객과 흥행에 영합할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걸려 두는 바둑을 관객이 재미있게 여기고, 그게 흥행도 되는 그런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대국 시간이 짧은 바둑, 속기 대국에서는 정상급 프로기사들도 시간이 충분한 대국에서보다 실수를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기보의 작품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둑을 누가 세계에서 제일 잘 두느냐를 가리는 것은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정상들은 어떤 바둑을 둘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 정상들은 팬들의 기대에 걸맞은 기보를 보여주어야 한다. 작품에 어울리는 상금도 중요하고, 상금에 어울리는 작품도 중요하다. 속도전, 그 알맹이 없는 유혹을 좀 떨쳐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