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도장 찍자” 품앗이 하듯 가입도
국회 연구단체는 다른 당 의원 2명 등 의원 10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구성이 가능하다. 사진은 국회 본회의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하나만 찍어주세요”
5월 31일 국회 의원회관 더민주 모 의원 사무실을 찾은 새누리당의 한 비서관은 다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류를 훑은 더민주 측 보좌관이 “우리는 이미 다 찼다”고 대답하자 그 비서관은 “아…이걸 다 채워야 하는데”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새누리당 비서관이 들고 있었던 서류는 ‘국회 연구단체 교섭의원 날인 명부.’ 명부 속엔 다른 의원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국회 연구단체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국회 연구단체 제도는 1994년 처음 도입됐다. 제도의 취지는 의원들의 연구 및 입법정책개발 활동의 활성화였다. 국회사무처는 제20대 국회의 연구단체 신청을 6월 말까지 받고 있다. 앞서의 더민주 보좌관은 “의원 10명 이상이 동의해야 연구단체 구성이 가능하다. 자신이 소속한 당뿐만 아니라 반드시 다른 당 2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의원실 입장에선 기존 업무보다 늘어나기 때문에 달갑지 않지만 의원들은 입법활동에 유리하기 때문에 굉장히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국회사무처는 6월 8일까지 7개의 연구단체가 등록을 마쳤다고 밝혔다. 박영선 더민주 의원이 주축인 ‘한국적 제3의 길’은 경제민주화 연구를 표방하는 단체다. 제17대 국회 때부터 활동하고 있는 한국적 제3의 길엔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과 박지원 더민주 원내대표가 참여할 예정이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법안을 대표발의하듯이 한 의원이 ‘이건 내가 해야 되겠다’며 총대를 메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의원들 대부분이 자신이 주도해서 연구단체 대표의원이 되고 싶어 한다”고 귀띔했다.
6월 7일 심상치 않은 연구단체도 출범했다. 비박 성향 의원들이 모인 ‘어젠다 2050’이다. 유승민계로 꼽히는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이 주도한 연구단체의 구성원 면면은 화려함 그 자체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국민의당 김성식 정책위의장, 무소속 유승민 의원 등 12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더민주의 또다른 보좌관은 “임팩트가 있다. 일단 ‘네임밸류’가 센 사람들이 있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이례적이다. 지금껏 이런 경우가 없었던 거 같다. 정권 교체와 연동된 연구단체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치열한 물밑경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의원별로 3개의 연구단체 가입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앞서의 새누리당 보좌관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3개밖에 할 수 없는데 연구단체는 수십 개다. 일단 인맥 있는 분들이 의원에게 부탁을 해온다. 예를 들어 ‘야 김 의원 내가 찍어줄게 나 이거 좀 해줘’하면서 품앗이하듯이 해주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약속을 하기가 좀 애매하다. 선수 높은 분들이 하자고 하면 마지못해 하는 경우도 있다. 친분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경우도 있는데 초선 땐 막 도장을 찍어준다. 정작 의원이 하고 싶은 연구단체는 나중에 하나밖에 안 남는다. 그래서 재선 때는 일단 도장을 미리 안 찍고 눈치를 본다.”
연구단체 유치 전쟁의 최전선에 나선 이들은 각 의원실 보좌진들이다. 일단 대부분의 의원실은 ‘통화량’으로 승부 걸고 있다. 더민주 보좌관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볼 수는 없다는 게 문제다. 일단 각 의원실 보좌관들한테 전화 돌린다. ‘다 했냐 안했냐. 비었냐 안비었냐’고 물어보고 비었다고 하면 ‘잠깐만 기다려라’ 하고 슬쩍 문건(?)을 전달한다. 그 다음에 의원들끼리 서로 통화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연구단체에 참여한 의원들은 지원금도 챙길 수 있다. 지난해 74개의 국회 연구단체는 12억 7827만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각 연구단체당 약 1720만 원을 연구활동비로 쓴 셈이다. 더민주 보좌관은 “큰 돈은 아니다. 교수한테 맡겨서 보고서라도 하나 제대로 나오려면 500만 원은 든다. 1년에 4번 분기마다 세미나 자료집을 인쇄하는 데 대략 200만 원이 든다. 빠듯해서 정말 아껴써야 되고 국회 권능을 이용해 용역비도 깎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연구단체 ‘무용론’도 제기하고 있다. 더민주의 한 관계자는 “사실 실적이 미미한 연구단체가 많다. 국회사무처가 해마다 연구단체를 평가하는데 하위를 기록한 단체들은 실제로 의원들이 활동 안 한다. 대표의원들만 일한다. 단체들의 보고서를 보면 질 떨어지는 단체들 많다. 매년 이런 연구단체를 퇴출한다고 하는데 의원들이 하는 건데 평가한답시고 연구단체들을 싹 날려버릴 수 있나. 예산 받아서 그냥 세미나 하는 수준이다. 개개 의원 보좌진들이 연구단체를 충분히 대신한다”고 보탰다.
연구단체를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보니 예산이 낭비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지난 4년간(2012~2015) 국회 연구단체가 제출한 정책연구 보고서는 388건이었다. 단체당 5.2건, 연평균 1.3건을 기록한 것이다. 4년간 연구보고서를 한 번도 제출하지 않은 단체는 7곳이었다. 더민주 보좌관은 “동아리 활동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동아리 활동 안했다고 페널티 주지 않는다. 정말 순수하게 의욕적으로 하지 않는 한 열심히 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