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돌풍인가 했더니 태풍이네
▲ 구리9단 | ||
세계 바둑 7대 메이저 타이틀이 가운데 이세돌 9단의 삼성화재배와 최철한 9단의 잉창치배를 뺀 나머지 다섯 개를 구리 9단이 석권한 것. 앞으로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구리의 시대가 열렸다는 게 중론이다. 이창호 9단이 7개 중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눈에 띈다.
조한승-리의 결승 5번기 제1국은 구리 9단의 완승. 조 9단은 초반에 큰 실리를 확보하며 일단 앞서나갔으나 중반 초입 상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구리 9단은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구리 9단의 수읽기와 힘이 돋보였다.
제2국은 조한승의 완승. 구리가 처음부터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조한승은 신축자재하게 움직이면서 한편 강력하게 받아치고 한편 과감하게 손을 빼면서 구리의 전열을 흔들었다. 구리의 펀치는 번번이 허공을 쳤고, 제풀에 쓰러졌다.
1 대 1이 되자 한국 응원석은 기세를 올렸다. 1국 전 날 프라자호텔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객관적인 전력에서 내가 열세라는 것, 승부처에서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것, 실제 이상으로 상황을 낙관하곤 한다는 것이 내 약점이라는 걸 인정한다. 이번 기회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2국까지 1 대 1만 된다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 3승1패로 이길 것 같다”고 결의를 보인 조한승의 말대로 되는 게 아닌가 해서였다. 내용도 멋졌다. 조한승의 특징은 부드러움 혹은 유연함. 그걸로 구리의 힘을 완벽하게 제압했으니 “구리를 상대로 이렇게 완승을 거두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이번에 조한승은 이유제강(以柔制剛)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는 상찬을 받았다.
제3국은 구리의 역전승. 2국에서 자신감을 얻은 조한승은 이제 이기는 길을 알았다는 듯 2국과 비슷한 패턴으로 국면을 짜면서 유연하게 형세를 리드했는데, 승리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난조에 빠지며 거듭 결정타를 놓쳤다.
제4국은 다시 구리의 완승. 조한승은 3국에서 결정타를 놓쳤다는 자책감 때문에서였는지 처음부터 필요 이상의 강수를 구사하다가 구리의 힘에 휘말리고 말았다. 155수 만에 끝난 단명국이었다.
조한승 9단으로서는 회환이 남는 결승5번기였을 것이다. 캐리어 부족이었다. 세계대회에서 준결승까지는 몇 번 올라갔지만 결승무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올 가을에는 많이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야 한다. 이번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것. 그런 점들이 강박관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금 불안해진다. 구리와 중국은 날로 기세가 등등한데, 우리 이창호 9단은 좀 지쳐 있고, 이세돌 9단은 심기가 좀 상해 있다. 이창호 9단은 그럴 만하다. 1986년에 입단해 1988년부터 타이틀을 따기 시작했고, 90년대 초반에 이미 세계 정상권에 들어갔으니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에게 더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으니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세돌 9단은 LG배에서 반외 변수로 구리에게 힘없이 졌고, 이후 한국리그 불참을 선언해 주변을 좀 불편하게 만들었다. 본인도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지만, 위치가 이세돌 9단쯤 되면 스스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도 있다는 것, 그런 것도 좀 생각해 주면 좋지 않을까 한다. 우리 바둑이 정상에 오래 있었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바둑계 전체가 뭔지 방만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전열을 한번 가다듬을 때가 된 것 같다.
어쨌거나 이번 BC카드배는 세계대회의 기존 관행을 깨고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선보임으로써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그런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해 본다.
64강 컷오프, 상금제의 취지는 일단 이해하겠지만, 우승 3억 원, 준우승 5000만 원. 64강은 300만 원이니 등수별 상금 액수의 차이가 너무 큰 것으로 보인다. 우승이 3억 원이면 준우승은 최하 1억 5000만 원 정도는 되어야 균형도 맞고 상금제 취지에도 어울리는 것 아닌지. 예선 출발부터 결승까지 3개월이라는 초스피드 일정은, 그게 꼭 좋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좌우간 일리가 있다 치더라도 결승 5번기를 제한시간 각 1시간으로 한 것, 5월 1일부터 5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닷새 연속으로 두게 한 것, 대국 시간을 저녁 7시로 잡은 것, 대국 장소가 외진 왕십리 한국기원 1층 한쪽에 있는 바둑TV인 것 등은 좀 이상해 보인다. 세계대회 결승이라는 행사의 품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바둑팬들의 관전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라고는 하는데, 글쎄 관전 편의보다는 방송 편의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