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쳐라 쳐…위자료나 듬뿍 받게’
▲ 청와대사진기자단 | ||
29일까지 노 대통령의 발언 진의와 복심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했던 정치권은 대통령의 잦은 말바꾸기에 이제는 ‘식상하다’는 반응을 넘어 분노와 냉소를 퍼붓고 있다. 야권은 물론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노 대통령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뜩이나 정계개편 문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제 계파들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통합신당파는 노 대통령이 ‘신당=지역당’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다. 이미 당·청 관계가 회복 불능 상태로 치달은 만큼 하루빨리 헤어지자는 ‘현실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청와대 만찬 거부’와 ‘최후통첩’이라는 맞짱 카드를 꺼내든 김근태(GT) 의장 진영은 결별 수순에 돌입한 분위기이고 기타 차기주자 진영과 제 계파들은 분당에 따른 손익계산을 따지며 최후 결정을 고민하고 있다.
‘떠나느냐’ 아니면 ‘남느냐’의 막다른 갈림길에 몰린 열린우리당의 격앙된 내부 분위기와 차기 대권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제 계파들의 향후 진로를 진단해 봤다.
노 대통령의 ‘갈지자’ 행보에 가장 격분하고 있는 인사는 다름 아닌 GT다. 그동안 다소 소극적이란 평가를 받아왔던 GT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측근들 사이에서도 “GT가 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노 대통령을 상대로 강펀치를 연일 날리고 있다.
청와대의 만찬 회동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가 하면 노 대통령의 ‘신당은 지역당’ 발언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박하며 각을 세우고 있다. GT는 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평화개혁 세력의 재결집을 추구하는 통합신당을 지역당으로 폄하하는 것은 모욕적 언사이자 제2의 대연정 발언”이라며 노 대통령을 강하게 성토했다.
그는 또 “대연정을 추진하며 ‘한나라당이 선거법 개정에 동의하면 권력을 통째로 넘겨도 좋다’는 발언이 우리 국민에게 모욕감을 주고 지지층을 와해시킨 일을 기억해야 한다”며 “통합신당 논의는 초심으로 돌아가 참여정부를 출범시킨 모든 평화세력을 재결집하는 것이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자는 얘기인데 이런 노력을 ‘지역당 회귀’로 규정하는 것은 다시 모욕감을 주는 것으로 유감스럽다”고 강조했다. 당·청 결별도 불사하겠다는 결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GT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일부 정치권 인사들은 “GT가 뭔가 작심을 한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1월 28일 기자와 만난 재야파의 한 초선의원은 “GT는 사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전제한 뒤 “여권의 총체적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당 의장직은 물론 더 중요한 것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GT”라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의원은 “상상에 맡기겠다”며 즉답을 피했지만 기자가 ‘대권 불출마 선언도 포함되느냐’고 묻자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는 노 대통령이 당적과 대통령직을 담보로 압박하고 있는 만큼 자신도 당 의장직과 대권 불출마 카드로 맞불을 놓을 수도 있다는 GT의 강한 의지를 체감할 수 있는 답변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당 내부에선 8일 정기국회가 끝나면 비대위를 해체하고 특대위를 구성해 당의 진로 및 정계개편 문제를 주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비대위를 비롯한 통합파의 분노도 극에 달하고 있다. 우상호 대변인은 1일 논평을 통해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름을 지키든지 새로운 신당을 만들든지 지역주의 극복 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이 점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비대위원으로 통합신당을 지지하고 있는 이석현 의원은 1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역을 초월해 평화민주개혁 세력을 결집시키자는 게 통합신당론”이라며 “노 대통령이 자주 말 바꾸기를 하고 신당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김근태 당의장 측은 대선 불출마 카드까지 거론하고 있다. | ||
중도파 의원들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인천지역의 신학용 의원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중도개혁 세력이 다 뭉치자는 게 왜 지역당인지 모르겠다”며 “대통령의 복심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서울지역의 한 초선의원은 “이제 짜증이 난다. 노 대통령이 탈당을 하든 열린우리당을 사수하든 알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DY(정동영 전 의장)계는 “이제 다 끝난 것 아니냐. 언제 어떤 식으로 헤어지느냐만 남아 있다”며 결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분위기다. 방미 중인 DY도 “이제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며 “국민이 원하고, 당에 책임 있는 분들과 논의해 공통인식이 있다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해 분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만 DY는 어떤 경우에도 대권 출마 의지는 꺾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DY계인 전북지역 한 의원은 29일 기자에게 “당 일각에서 분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DY와 GT 모두 대권 불출마 선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DY는 GT가 처한 정치상황과 또 다르다”며 “원외인 DY에게 대권 포기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를 그만두라는 얘기인데 DY가 그렇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통합신당론을 주창하며 호남 입지 다지기에 주력하고 있는 천정배 의원은 “대통령이 탈당할 필요가 없고 대통령과 당은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정을 이끌어가야 한다”며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1일 모 라디오 프로에 출연한 천 의원은 “지금은 당청이 다시 관계를 복원하고 협력 관계를 더 공고히함으로써 민생 문제를 비롯해 여러 국정 현안을 원활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 사수를 주장하고 있는 친노세력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적극 옹호하면서 “더 이상 대통령을 흔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일부 친노세력들은 열린우리당이 분당 위기로 치닫게 된 데에는 전·현직 지도부의 책임이 막중하다며 GT와 DY가 대권불출마를 선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노 대통령의 386 핵심 측근인 이광재 의원은 대통령의 일련의 발언에 대해 “당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 당에서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뜻일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고 당내 대표적인 친노성향 의원 모임인 ‘의정연’을 이끌고 있는 이화영 의원은 “미래지향적 정당이 탄생하는 데 대해 자신의 거취를 그 흐름에 맡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또 부산지역 열린우리당 당원들은 11월 29일 “더 이상 대통령을 흔들지 말라”는 성명을 내고 “비대위는 정계개편 논의를 정기국회가 끝난 뒤 수석당원인 대통령을 포함해 전국 각 지역의 당원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질서 있는 모습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노 대통령 발언 이후 당내 계파 간 갈등이 증폭되자 문희상 김덕규 유인태 의원 등 중진들의 모임인 ‘광장’은 당·청 갈등과 친노 대 반노 간 대결구도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중재에 나서고 있으나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당·청 수장인 GT와 노 대통령이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고 정계개편 문제와 관련한 통합파와 당 사수파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만큼 결별을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계파 간 ‘대혈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남는 자나 떠나는 자 모두 결행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