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갈라서면 위자료는커녕 몰매 맞지…’
▲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편지’와 중진 만남 이후 통합신당 논의는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난 1일 갈등조정특위 위촉장 수여식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정국으로 탄생한 열린우리당은 정권 재창출이 난망해지자 통합신당 창당을 부르짖는 쪽과 당사수파로 나뉘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측의 갈등은 노 대통령이 통합신당을 ‘지역당’으로 공개 비판하면서 변곡점에 이르렀다. 한때 ‘이혼’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갈라서면 공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양측은 또 다시 지루한 명분 쌓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핵분열 시나리오를 집중 점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순방 출국 하루 전인 지난 12월 1일 열린우리당 중진들과 비공개 면담을 잡았다가 갑자기 취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언론에 사전 노출돼 양측의 만남이 무산됐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런데 이 모임이 무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노 대통령은 일부 중진들을 ‘비밀리에’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중진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밖에 없다. 지금은 같이 가야 한다”며 ‘휴전’을 합의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청와대 측도 이 문제에 대해 “중진들과 만난 것 자체가 그런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굳이 부인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노 대통령은 이날 모임 바로 하루 전인 11월 30일 청와대 참모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을 지킬 것”이라고 말해 통합신당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온 바 있다. 예상보다 크게 반발하는 통합신당파의 반응에 청와대도 적잖게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청와대는 일부 언론사 간부들로부터 ‘지역당’ 발언과 관련한 ‘의견’을 수렴했는데 대부분 “이대로 갈라서서는 공멸만 있을 뿐이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인 12월 1일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일부 중진들과의 면담을 통해 자신 발언의 진의를 설명하고 ‘확전은 하지 말자’는 공감대도 얻어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당·청 간의 막후 소통 때문이었는지 통합신당파와 친노그룹 간의 갈등도 잠시 냉각기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내일이라도 당장 ‘이혼’을 결행할 것 같던 통합신당파는 친노그룹이 반대했던 정계개편 ‘설문조사’의 시기를 연기한 데 이어 내년 전당대회까지 추이를 좀 보자는 쪽으로 입장이 선회하고 있다. 왜 통합신당파는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물러서고 있는 것일까.
먼저 국민들은 현재 진행되는 정계개편을 ‘민주개혁세력 대연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 쟁탈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탈당이 유력시되는 통합신당파로서는 탈당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우려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 전문가는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지역구에 한번 가보라. 지역주민들은 ‘말도 되지 않는 정계개편 논의에 쏟아 붓는 시간의 반만이라도 경제 회생 토론에 투자하라’며 분노한다. 지금 국민들은 여권의 정계개편을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의 추잡한 싸움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성난 ‘민심’을 따르지 않을 경우 공멸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여권의 정계개편 논의를 주춤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당내 다수파인 통합신당파가 친노세력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자제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에 대해 “지금은 통합신당파와 친노그룹이 사생결단식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어찌 보면 현재의 갈등은 내년 대선 전 재결합을 앞둔 ‘위장이혼’ 성격도 있다. 일단 각자 헤어진 뒤 별도의 당으로 움직이다가 내년 대선 직전 ‘마지막 대통합’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양측의 감정대립이 깊어져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주고받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막판에 친노그룹이 계속 ‘마이웨이’를 외친다면 대선 승리도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한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헤어지고 싶지만 내년 대선 구도에서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 비율이 3~5% 정도만 남아 있어도 승패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을 버리는 것은 비호남 민주세력을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것은 승패의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다(지난 1997년 대선은 39만 표 차이인 1.4%, 2002년 대선은 57만 표 차이인 2.3%로 승패가 결정됐다). 대의를 위해 모이는 것은 괜찮지만 노 대통령을 밟고 가는 것은 ‘자살골’이다”라고 말했다.
▲ 지난 8일 확대간부회의장의 김근태 당의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리고 통합신당파가 먼저 탈당할 경우 국고보조금(약 50억원)에서 많은 손해를 보는 데다 창당 자금을 마련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비례대표 의원(23명)들은 탈당할 경우 자동적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탈당 대열에 동참할 의원이 예상보다 적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친노그룹 입장에서도 탈당까지 무릅쓰고 노 대통령을 따라갈 원내 의원이 생각보다 적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결국 창당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도 당에 남아 ‘열린우리당’ 이름을 지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통합신당은 ‘과격한’ 선택을 할 수 없고 열린우리당의 분열도 양쪽이 서로의 눈치만 보며 지루하게 장기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정치권에선 열린우리당의 분열이 내년 2월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통합신당파는 전당대회를 통해 통합신당 수임기구 설치를 관철시켜 신당 창당을 강행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당대회에서 불거질 극심한 분열을 피하기 위해 특별비상대책위원회에 당 진로 결정 권한을 일임하는 방법도 떠오르고 있다. 통합신당파는 어떤 경우를 택하든 친노그룹을 의도적으로 배제시켜 그들이 뛰쳐나갈 명분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노세력으로서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친노 당원들을 총동원해 ‘통합신당 창당’의 최종 인준을 막을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자신 있게’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미래를 결정하자고 하는 배경에는 막강한 후원군이 있기 때문이다. 5·31 지방선거 이후 탈당이 늘어 현재 당비를 내는 열린우리당 당원은 10만 명 이하 수준이지만 친노 성향 당원들의 이탈은 적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최근 비상대책위원회가 기초당원 요건을 완화하고 공로당원제를 도입하는 등 통합신당파의 세력을 늘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친노진영은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전당대회 방식이 기존의 경우처럼 대의원 선거를 통한 지도부 경선으로 치러질 경우, 친노진영의 당원·대의원 비율은 상대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양측이 박빙의 승부를 벌일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전당대회 결과의 핵심은 어떤 세력이 탈당을 할 것인지 여부다. 노 대통령이 당적 포기 시사발언을 했을 당시만 해도 친노계열을 포함한 개혁 성향 의원들이 탈당하고 통합신당파가 남아 범여권의 정치세력과 통합신당을 꾸릴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다시 당적 유지 쪽으로 발언으로 바꾸고 친노세력의 당 사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제는 통합신당파가 당을 뛰쳐나가 새 살림을 꾸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을 돌아보면 당시 신당 창당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무회의 인준과정에서 민주당 사수파가 완강히 거부해 불발에 그쳤다. 결국 신당추진파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수밖에 없었다. 통합신당파도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친노그룹의 길을 갈 것이라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하지만 이때는 ‘도로 민주당’을 위한 탈당세력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써야 한다. 또한 ‘헤쳐모여 식’ 신당을 원하는 고건 전 총리 쪽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줄 가능성도 있다.
현재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논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권 일각에선 충격요법도 나온다. 먼저 여권 대권 주자인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나 정동영 전 의장이 ‘대권 포기 선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국민적 관심을 끌면서 외부세력과의 연대에 획기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일부가 ‘즉각 탈당’을 해 꺼져 가는 통합신당 논의에 군불을 지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제는 너무 늦었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던지고 있다.
어찌됐든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다만 어느 쪽이 명분을 갖추느냐만 남아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대선을 위한 동력을 누가 더 간직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