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면서 저도 성장했어요”
▲ 추신수 | ||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애리조나 집입니다. 시즌을 마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는 순간 감기 기운이 올라오더니 일주일 내내 심하게 아팠습니다. 목도 붓고 기침도 심하고….
처음 일기 연재를 제안받았을 때는 걱정이 컸어요. 공개적인 일기는 처음하는 일이라 과연 그 일기가 진정한 일기로 보여질까 하는 우려가 있었거든요. 고민 끝에 시작하기로 했지만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다는 게 정확할 거예요. 그러나 일기를 시작하고 너무나 좋은 반응들을 느낄 수 있었고 많은 팬들이 제 일기가 나올 때만을 기다린다며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사실 일기는 인터뷰 기사와는 많이 다르잖아요. 일기에선 추신수란 선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고 있는지, 어떤 심정으로 야구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신념을 갖고 시즌을 풀어가는지에 대해 진실이 담겨 있었어요. 걱정을 안고 시작한 일기였지만 저한테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저 또한 책임감을 갖고 일기를 썼습니다.
노 대통령 서거시, 검은 리본을 달고 싶었다(<일요신문>890호)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와이프한테 전해 듣고 저 또한 충격이 컸어요. 전 정치에 대해 문외한이고, 누구 편도 아니라 소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비극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잖아요. 그래서 검은 리본이라도 달고 경기에 참가하고 싶었는데 메이저리그 규율상 허락되지 않는 행동이라고 해서 그냥 마음으로만 애도를 표했어요.
'대장'은 주위 사람 말에 귀 기울여야(892호)
전 메이저리그가 최고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중·고등학교 야구에서도 배울 게 많거든요. 아마추어 선수들의 순수한 허슬플레이, 기본기에 충실한 야구 등은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배워야 한다고 믿어요. 한 팀의 주장이든, 나라를 이끄는 ‘대장’이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할 게 아니라 마이너리그 선수들, 아랫 사람들, 노선이 다른 정치인들의 충고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어요. 그건 부부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역 문제는 혼자 풀기 힘든 '숙제'(893호)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내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는 것 외엔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한국에서 병역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라 섣불리 입을 열기가 어려워요. 제가 뭘 바란다고,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 병역 문제를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절 대신해서 군에 입대하겠다고 말씀해주신 많은 분들, 정말 고마웠어요. 그분들의 마음이.
동의대 조성옥 감독의 죽음(895호)
지금도 조성옥 감독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얼마전 조 감독님의 아들 찬희가 클리블랜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독님의 유니폼을 갖고 왔더라고요. 클리블랜드에서 짐을 챙겨 애리조나 집으로 오면서 감독님 유니폼을 가방에 담아 왔습니다. 지금은 애리조나의 제 방에 감독님 유니폼이 걸려 있어요. 그 유니폼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아직도 말이죠.
존경하는 웨지 감독과의 이별(908호)
클리블랜드에서 시즌 막판에 선수들을 대거 트레이드시켰었죠. 빅터 마르티네스(보스턴 레드삭스)와 벤 프란시스코(필라델피아 필리스)가 가장 아쉬웠던 선수예요. 하지만 두 선수가 속한 팀들이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거 보면 부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 전 프란시스코와 통화를 했는데 필라델피아에선 워낙 빵빵한 외야수들이 많아서인지 출전 기회가 많지 않다고 울상이더라고요. 선수는 시합에 자주 나가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줄어드니까 걱정이 많겠죠. 내년에는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데, 글쎄요, 뭐 선수가 원한다고 트레이드가 단행되는 건 아니니까 지켜봐야겠죠.
보스턴과의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감독님 방을 찾아갔습니다. 인사를 드리려고 노크를 했더니 웨지 감독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악수를 청하셨어요. 저더러 ‘가족들을 제일 먼저 신경 쓰라’며 선수들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야구가 아닌 가족이라는 메시지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감독직에서 해임되면서 직업을 잃는 거나 마찬가진데 얼굴 표정에선 서운함이나 아쉬움 등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알다시피 클리블랜드의 성적이 감독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모든 걸 책임지고 깔끔하게 떠나시는 웨지 감독님이 진정한 ‘대장’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0 클럽 가입 달성(908호)
전반기에 홈런 13개를 때렸을 때만 해도 올시즌 예상 홈런이 25개에서 30개 정도 됐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홈런이 나오지 않으니까 어느 정도 포기가 되더라고요. 그냥 홈런은 포기하고 타율만 신경쓰자 했었죠. 그러다 17호 홈런이 나오니까 ‘이거 되겠다’ 싶은 거예요. 19호 홈런을 쳤을 때는 20-20은 무조건 성공시켜야겠다는 각오가 섰습니다. 그로 인해 무지하게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오죽했으면 시즌 마치자마자 심한 감기에 걸렸겠습니까. 경기 전에는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요. ‘오늘은 가볍게 가자. 무조건 가볍게, 가볍게’라고요. 그런데 저도 사람인지라 막상 타석에 서면 큰 걸 노리게 되고 그로 인해 스윙하는 폼이 굉장히 커지더라고요.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20-20은 큰 기록이 아닙니다. 단 이치로나 마쓰이도 하지 못한 기록을 제가 세웠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일본 선수들보다는 더 잘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재미있는 건 팀 동료 선수들이에요. 그들은 모두 제가 20-20을 달성할 거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제가 19호 홈런에서 마구 헤매고 있을 때도 ‘추! 넌 분명히 해낼거야’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만약 내가 홈런 20개를 치면 베이스를 돌 때마다 텀블링도 하고 괴성도 지르겠다’라고요. 마지막에 홈런 치고 베이스를 돌아오니까 선수들이 왜 텀블링 안 하느냐고 무지 뭐라고 하더라고요.
시즌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년 성적에 대해 많은 예상 기사들이 나오네요. 전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그저 해마다 발전하는 선수였음 좋겠어요. 올해보다 더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요, 홈런도 21개 이상은 돼야 하겠죠. 그래서 해마다 업그레이드가 되는 선수라면 ‘메이저리그 추신수’는 가장 행복한 선수가 될 겁니다.
오랜 시간동안 제 일기를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신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11월 초에 귀국해서 직접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게요. 여러분들이 절 사랑해주시는 것 이상으로 저도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애리조나에서 추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