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꼴 사제간 ‘데이터 야구’ 빅뱅
▲ 조범현(왼쪽)과 김성근 | ||
KIA 조범현 감독과 SK 김성근 감독의 인연은 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성근 감독이 충암고 사령탑을 맡고 있었고, 조범현 감독은 충암고 포수였다. 김성근 감독이 OB 사령탑을 맡고 있을 때에도 포수 조범현을 아꼈고, 쌍방울 감독 시절에는 조범현 감독을 배터리 코치로 데리고 있기도 했다.
지금은 ‘야구의 신’이란 닉네임까지 얻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김성근 감독이지만 재일교포 출신이란 이유로 젊은 시절 이런저런 고생을 정말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자로서 실력은 있으되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것처럼 대우받는 역차별 때문에, 대부분의 후배 야구인들은 김성근 감독과 한 줄에 서는 걸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범현 감독은 이른바 ‘김성근 라인’을 자처할 정도로 옛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켜왔다. 현재 SK 2군을 맡고 있는 계형철 감독, 성균관대 이연수 감독 등과 함께 조범현 감독은 ‘김성근 라인’의 대표 인물로 거론되곤 했다. 물론 김성근 감독도 예전부터 조범현 감독의 성실성을 높게 평가해왔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이번 한국시리즈가 흥미롭다는 것이다.
물론 사제관계가 늘 평온했던 건 아니다. 본의아니게 껄끄러운 장면이 연출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06년 말 이뤄진 ‘SK 정권교체’였다. 조범현 감독이 처음으로 감독이 된 건 지난 2002년 가을이다. 삼성에서 배터리코치를 맡고 있었는데 SK가 감독으로 영입했다. 부임 첫 해인 2003년 곧바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 조범현 감독은 그러나 성적 하락세를 보이다 결국엔 2006년을 끝으로 SK 지휘봉을 놓게 된다. 이때 새롭게 SK 사령탑으로 뽑힌 인물이 바로 김성근 감독이다. 어찌보면 스승이 옛 제자의 자리를 꿰찬 셈이 됐으니 당사자들의 속마음은 뭔가 모를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아니랄까봐, 최근 몇 년간 비슷한 행보를 보여준 것도 독특하다. 2006년 말 김성근 감독이 SK 사령탑으로 취임할 때만 해도 2년짜리 ‘시한부 감독’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SK가 김성근 감독과 함께 미국에서 이만수 수석코치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계약기간 2년을 채우고 팀을 정비하면 그 후에는 이만수 코치가 사령탑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았다. 실제 SK의 계획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인할 길이 없다. 중요한 건 그 2년간 김성근 감독이 모두 우승을 차지하면서 재계약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SK는 재계약 당시 김성근 감독에게 역대 감독 최고액 연봉(4억 원)을 선물했다.
조범현 감독이 2008년부터 KIA를 맡았을 때에도 비슷한 시선이 주를 이뤘다. 2년짜리 계약이었다. 광주 출신이 아닌 조범현 감독의 입지가 약하기 때문에 성적이 나지 않으면 중도 하차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2년짜리 계약이 중간에 끝난다는 건 엄청난 불명예이기도 하다. 실제 지난해 KIA가 하위권에서 맴돌 때, ‘2008시즌이 끝나면 조범현 감독은 경질된다’는 얘기를 많은 야구인들이 하고 다녔다. 결과적으로는 2년째 지휘봉을 잡았고, 올 시즌엔 KIA를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가 끝나면 계약이 만료되는 조범현 감독은 무조건 재계약이 결정 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KIA 팬들은 한때 조 감독을 ‘조뱀’이라고 칭하며 폄하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갈량’이라 부르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공교롭게 두 감독은 혈액형도 A형으로 같다. 김성근 감독의 경우엔 O형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듯한데, 구단 공식홈페이지에 따르면 A형이다. 혈액형이 성격이나 개인의 스타일과 연관된다는 건 어디까지나 근거없는 속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혈액형을 스타일과 연관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두 감독은 거의 완벽하게 A형의 통설과 맞아떨어지는 성향을 보인다. A형의 특징을 보여주는 많은 단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섬세함’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이터 야구의 대가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은 섬세함의 극치다. “저 타자는 왼손투수에게는 강하지만 낮경기에선 왼손투수에게 약했던 걸로 기억난다”고 말할 정도로 경기 외적인 많은 변수를 일일이 체크하는 감독이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 감독은 홈게임이었는데도 빨간색 원정유니폼을 입은 뒤 점퍼로 이를 감추고 경기를 지휘해 화제가 됐다. 징크스 때문이었다. 징크스는 다른 말로 하면 신경쓰인다는 얘기고 이는 곧 섬세함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조범현 감독도 섬세하다. 특히 포수 출신이기 때문에 상대팀 선수들의 경기 전 훈련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오늘 OOO는 컨디션이 너무 좋으니 되도록 거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김성근 감독처럼 징크스를 많이 따지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선수들의 데이터를 일일이 비교해가며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상의 라인업을 짜기 위해 고심한다는 측면에선 결국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SK와 KIA를 바라볼 때 팬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슈퍼스타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 SK가 KIA에 비하면 팀 연봉이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다. SK의 총연봉 규모는 54억 원 수준이고 KIA는 37억 원 안팎이다. SK가 팀 연봉이 매우 높은 건 아무래도 최근 2년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선수 개인마다 몸값 인상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KIA의 경우에는 서재응 최희섭과 같은 굵직한 해외파 선수들이 몸값의 상당 부분을 계약금 명목으로 받았기 때문에 실제 연봉 계산에선 누락된 측면도 있긴 하다.
연봉을 떠나서 봤을 때에는, SK는 이미지상 ‘고만고만한 선수’의 총합이 위력을 발휘하는 팀이다. KIA는 ‘스타의 팀’이다. 그래서 경기력 차원에서는 두 팀이 비교적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SK와 두산의 플레이오프에서 이미 SK의 위력이 드러났다. 박정권 박재상 김강민 정근우 최정 나주환 등이 언제 누가 터질지 모르는 잠재력을 보여준다. 투수진도 비슷한 형태다. 윤길현 정우람 이승호 정대현 등 불펜투수들이 줄줄이 투입되면서 짧게 끊어던지는 스타일의 ‘벌떼 야구’를 한다.
KIA는 투타에서 화려함이 돋보인다. 로페즈-윤석민-구톰슨-양현종으로 이어지는 선발투수 4명은 포커로 치면 ‘에이스 포카드’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타선에선 역시 최희섭, 그리고 올 시즌 기량이 만개한 김상현이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최고의 베테랑 이종범이 버티고 있으니 이름값만으로 번쩍번쩍 빛날 정도다. 한편으론 이같은 타선의 구조가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최희섭과 김상현이 집중 견제를 받기 시작하면 의외로 허약한 체질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SK는 한국시리즈에서 그런 쪽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패턴을 잡았을 것이다.
SK는 과거 쌍방울을 모태로 해서 2000년에 창단된 팀이다. 쌍방울은 막판에는 재정난을 피하기 위해 좋은 선수들을 타 구단에 팔아서 연명했던 팀이다. 그러다보니 쌍방울 출신 선수들은 SK로 팀이 바뀐 뒤에도 어깨를 펴지 못하고 뭔가 기가 죽어있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이런 전통과 분위기가 이어져온 선수들에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인물이 바로 2002년 말 지휘봉을 잡았던 조범현 감독이다. 그리고 지옥훈련을 통해 선수 개개인을 담금질하고, 각자 강점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부심을 심어준 인물이 바로 지금의 김성근 감독이라 볼 수 있다.
SK 선수들은 일단 승부 상황에 몰입하면 특별한 감독 지시가 없어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지금의 SK를 과거 해태 전성기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야구인들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KIA 선수들은 전성기 해태 시절의 팀컬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군대 수준의 선후배 관계를 보여줬던 해태 시절의 엄격함은 사라지고 대신 개성을 펼쳐보일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평가다. 기본적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온 SK가 체력면에서 불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시리즈란 무대는 없던 체력까지 나오게 만드는 최후의 격전지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이 쉽사리 어느 한쪽의 우위를 점치지 못한다. 보름 넘게 쉰 KIA는 정규시즌에서 강점을 보인 선발진의 우위만 지켜낸다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 불안한 구석이 있다면, 그건 선수들이 너무 오랜만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다는 점일 것이다.
지난 10월 15일 열린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에서 “상대 팀이 몇 승을 할 것 같은가”라는 사회자 질문에 김상훈은 손가락 두 개를 폈고, 김재현은 세 개를 폈다. 즉 김상훈은 KIA가 4승2패로 이긴다는 뜻이고, 김재현은 SK가 4승3패로 승리한다는 의미였다. 과연 이들의 바람대로 될 수 있을까.
한국시리즈 비하인드 스토리
김성근의 도발은 밑밥깔기?
▲ 한국시리즈 1차전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기아의 더그아웃. 유장훈 기자 | ||
○…‘KIA는 SK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오는 시나리오를 두려워한다’는 게 첫 번째다. KIA는 올 정규시즌에서 SK 상대로 10승2무7패로 강세를 보였다. 거꾸로 SK 입장에서 보면 맞대결 전적에서 뒤진 상대는 KIA뿐이었다. 이처럼 좋은 경기를 펼쳤던 KIA가 SK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래도 SK는 단기전에서 최상의 결과를 뽑아내는 능력이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는 김성근 감독이란 거목이 버티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실전 이외에 심리전의 대가이기도 하다. 실제 몇몇 KIA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두산이 올라오면 우리가 무조건 우승, SK를 만나게 되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는 후문이다. 조범현 감독은 최전선에서 팀을 이끄는 입장이니 당연히 이 같은 뉘앙스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러나 KIA 선수단이 SK를 꺼리고 있다는 정황은 여러 면에서 포착됐다. 물론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 실제 이 같은 거리낌이 KIA 측에 있었다면 본무대에서 어떤 형태로든 변수가 될 수도 있다.
○…‘두산은 우승은 못하더라도 SK 발목을 잡고 싶어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두산은 지난 2년간 매번 한국시리즈에서 SK에게 패했다. 그것도 늘 기분 나쁜 역전패였다. 그 과정에서 빈볼 시비 등 감정싸움도 여러 차례 있었다. 현실적으로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모두 거쳐야 하는 두산 입장에선 과거 통계를 봤을 때 우승이 힘든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어차피 우승이 힘들다면 플레이오프에서 어떻게든 SK를 지치게 만들어서 우승을 못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는 게 루머의 요지였다. 루머와 관계없이 플레이오프 초반 2연승을 했던 두산으로선 오히려 대단히 좋은 찬스를 잡았었다. 그러나 결국 역전패했다. 루머가 사실이라면, 두산은 5차전까지 치렀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물론 기분은 참담하겠지만 말이다.
○…‘김성근 감독의 심판 견제는 한국시리즈용이었다’는 풍문도 나왔다. 정규시즌 막판에 김성근 감독은 “KIA와 경기하면 이상하게 판정에 문제가 생긴다”는 발언을 해 파장을 일으켰다. KIA 입장에선 대단히 기분 나쁜 ‘딴지걸기’가 아닐 수 없다. 이건 가만히 보면 96년 한국시리즈 때 해태 김응용 감독이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하면서 “특정지역(인천) 출신이 편파 판정을 한다”면서 심판실을 한바탕 휘저었던 사례와 유사하다. 정황상 KIA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김성근 감독이 미리 신경전을 펼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심판도 사람이다. 편파판정이 전혀 없었음에도 누군가 경고장을 내면 그 팀 경기 때 괜히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이 소문 역시 진실을 확인할 순 없겠지만,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판정 시비가 나올 경우 김성근 감독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형기 야구전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