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그립다 VS 그건 오버야
▲ 이봉주가 삼성의 코치직 제안에 즉답을 회피하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
본격적인 ‘은퇴 후 행보’를 따지기에 앞서 선수시절 신혼여행에 가서도 조깅을 했던 이봉주가 은퇴 다음날에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어제 은퇴식을 했는데 오늘 아침도 뛰었느냐”고 첫 질문을 던졌다.
이봉주의 대답은 역시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다. “응 조금 뛰었지 뭐. 은퇴는 했지만 워낙 몸에 밴 습관이고, 또 건강을 위해서도 종종 달리는 것은 좋잖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운동인 마라톤. 평생 그 외길을 위해 그 힘든 달리기 훈련에 시달렸는데 은퇴를 하고도 “살살 뛰고 있다”고 하니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봉주의 향후 행보는 소속팀이자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사인 삼성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이어가느냐가 관건이다. 아직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봉주의 소속팀인 삼성전자육상단(단장 최우수)은 이미 이봉주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이봉주가 2000년 삼성전자육상단의 창단멤버로 지금까지 9년여 동안 세 차례 올림픽 출전, 보스턴마라톤 우승, 아시안게임 2연패 달성 등 큰 공헌을 했기에 지도자의 길을 보장한 것이다.
삼성전자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은 23일 “육상단은 물론이고, 회사(삼성그룹을 의미) 차원에서도 이봉주 선수를 최대한 예우하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이봉주 선수와 가장 가까운 오인환 감독이 아직 현역지도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기에 일단 그 밑에서 착실히 지도자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다. 물론 코치직을 수락한다면 삼성전자육상단의 코치로 해외연수도 지원할 생각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봉주는 현재 이런 삼성의 제안에 대해 확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예스’를 택한다면 ‘지도자 이봉주의 새로운 출발’은 아주 간단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봉주 스스로 “일단은 좀 쉬고 싶다.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말을 아끼고 있다.
이봉주와 삼성전자의 계약은 올해로 종료된다. 즉 12월 31일 이전에 코치 등 어떤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으면 이봉주와 삼성의 공식적인 관계는 끝이 나는 것이다.
대부분 현역에서 물러난 선수들은 안정된 지도자 자리를 얻지 못해 안달인데 왜 이봉주는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한국 최고의 기업이 모회사이고, 육상단도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부러워하는 지원시스템을 갖고 있는 ‘삼성’인데 말이다. 이봉주의 한 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삼성이라는 회사가 언뜻 보면 월급도 많고 상당히 좋은 회사인 것 같은데 솔직히 피곤한 면도 있다. 워낙에 회사 체계가 엄격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삼성맨으로 살아온 이봉주이기에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봉주 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다. 삼성에 얽매이지 않고도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다. 뭐 이봉주를 주축으로 새로운 마라톤팀을 만들려고 하는 기업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 코치’보다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
실제로 이봉주가 은퇴하자마자 대한육상경기연맹은 국가대표 트레이너직을 제의했다. 또 많은 실업팀들이 이봉주가 삼성을 떠날 경우 감독 등 초특급 대우로 영입할 의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 몇 년간 이봉주가 이끄는 새로운 마라톤팀을 창단하겠다는 기업의 이름도 몇 차례 흘러나온 바 있다.
그렇다. 이봉주의 인기가 너무 좋은 것이 문제다. 성실함과 순박함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봉주는 이미지가 더없이 좋다. 따라서 삼성 외에도 다른 가능성이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자신의 은사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오인환 감독, 그리고 삼성 고위층의 눈치를 보며 삼성맨으로 살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성전자육상단의 단장은 물론 그룹 고위층이 직접 이봉주에게 ‘코치직 수락’을 당부했지만 아직까지 확답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봉주가 ‘영원한 삼성맨’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한 육상인은 “스타플레이어가 선수 시절의 화려함에 취해 제2의 인생에서 많은 실수를 하는 예는 너무 많다. 육상에서도 ‘몬주익의 영웅’인 황영조가 크고 작은 문제를 야기해 주위로 지탄을 받은 일이 있다. 이봉주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펜싱영웅 김영호도 실업팀 창단 등 이것저것 많은 일을 벌였지만 현재 펜싱계 주류에서 밀려나 있다. 빙상의 김동성, 수많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등 다른 종목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은 ‘은퇴 후 모습’이 제법 있다. 인기는 잠깐이다. 주위의 치켜세움에 오버를 하지 않고, 삼성과의 좋은 관계를 맺으며 영원한 삼성맨으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봉주를 가장 잘 아는 오인환 감독은 “이미 (이)봉주에게 할 말은 다 해줬다. 또래들이 감독을 할 정도로 나이도 적지 않은데 이제는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할 수도 없다. 본인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