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 도처에 ‘미생마’ 하나하나 살려가야죠”
이번 기사회장 선거에는 최규병 9단 외에 27~28대를 연임하고 있는 조대현 9단(50), 중견층의 지지를 받은 김수장 9단(52), 이창호-최명훈 9단 등과 1975년생 동갑으로 젊은 층의 지지 속에 신세대 기수론을 외친 양건 8단(34) 등 4명이 입후보, 역대 선거 중 가장 열띤 경쟁을 벌였고, 투표에 참여한 인원 또한 한국기원 소속 전체 241명의 프로기사 가운데 175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19일 저녁 최규병 신임 기사회장을 만나 보았다.
― 언젠가 한국기원 사무총장을 할 거라는 얘기는 많았지만, 기사회장에 출마할 거라는 얘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 그런 걸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고, 그저 나이를 좀 더 먹어 뭘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다면 내가 살아온 동네가 바둑계니, 바둑계를 위해 일할 수 있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다,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있으면 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르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 기사회장 출마를 결심한 건 언제쯤인가.
▲ 추석 전후니까 두 달쯤 된 것 같다.
―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는 얘긴데, 동기가 있었나.
▲ 바둑계가 위기라고 말들을 한다. 정확히 말하면 ‘프로바둑계’의 위기라 하겠지만. 중국에게 세계 1등 위협받고 있다, 개혁을 해야 한다, 입단 문호를 넓혀라, 프로기전을 상금제로 하자, 이런 안건들이 계속 등장하고 얘기들은 무성한데, 실천에 앞장 서는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나서 보자, 그래서 결심했다.
― 무슨 일부터 할 건가.
▲ 공론의 장을 만들 생각이다. 각자의 아이디어들은 장단점이 다 있으니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보완하면서 정립해 가려고 한다.
― 입단 문호를 넓히는 게 맞다고 보는지….
▲ 한국기원 밖에 프로보다 센 실력자들이 있는 게 사실 아닙니까.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끌어들이는 게 옳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연구생 입단 연령 상한선을 15세로 낮추자는 의견도 일리 있게 들린다.
▲ 지금 18세 제도에서는, 이때까지 입단을 못하면 바로 군에 가야 되고, 그래서 아까운 청소년 인재들이 인생의 황금기에 자칫 방황하게 되는 그런 면이 분명 있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큰 숙제다. 다만 15세로 낮추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낮춘다 하더라도 15세에 입단대회에 나올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미 10년은 바둑에 투자한 경우가 보통이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했을 테니까. 그런데 10년을 공부해 온 아이들이 쉽게 포기할까?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입단 재수, 삼수의 연령만 낮아지게 될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점진적으로 다른 문제들과 함께 연구해야 할 사안으로 본다.
― 상금제는 바람직하다고 보는지….
▲ 궁극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더 다듬어야겠다. 64강, 32강 다 좋은데, 어느 날 갑자기 그래 버리니 거기서 소외된 기사들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좋은 취지의 개혁이 호응을 못 받는 것이다. 가령 128강이나 256강 정도로 넓힌다면 불만도 적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건 또 기전 주최 쪽에서 ‘저기는 64강, 32강인데 우리는 왜 128강으로 해야 하느냐’고 나올 수 있다. 결국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면서 조율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나도 예선에서 4연승을 했는데, 예선 결승에서 지니까 수입이 없었다…^^ 프로기사가 대회에 나가 바둑을 두고 대국료를 못 받는다는 건 속상하는 일이다…^^
― 이세돌 9단, 빨리 복귀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 이 9단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본인이 쉬고 싶다고 해서, 허가해 준 것이니 본인이 복귀하고 싶다면 또 그때 의논해서 오면 될 것이다.
― 평소 친한 사이로 알고 있다. 기사회장으로서 복귀를 권유해 보는 건 어떨까.
▲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가서 권유했다가 이 9단이 거절하면? 그때는 정말 피차 어렵게 되는 거 아닌가. 설령 누군가 중재를 해서 복귀한다고 해도, 복귀한 후에 다시 비슷한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누가 책임을 질건가. 잘못하면 인재 한 사람만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 기사회장 다음엔 혹시 사무총장도….
▲ 기사회장이 사무총장보다 높은 자리 아닌가. 높은 자리에 있다가 낮은 자리로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하, 농담이다. 기사회장이 됐으니 총장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기사회장은 실권이 없다. 기사회는 임의친목단체니까. 구체적인 실무행정은 총장이 지휘하는 것이고. 그러나 프로기사로서 1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200여 명 선후배 동료 기사들의 여론을 잘 듣고 바둑계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일도 의의가 있고 보람도 있다.
― 한국리그 감독은 계속 하시나.
▲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못하는 것 아닌가.
최규병 기사회장은 누구
한국리그 2연패 이끈 ''명장''
최규병 신임 기사회장은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한국 바둑계에서 로열 패밀리로 불리는 ‘조남철 가계’ 제3세대의 맏형. 조남철 9단이 작은외할아버지이며 조상연 5단, 조치훈 9단 형제는 외삼촌이고, 이성재 9단은 이종사촌 동생이다.
명문가의 후예답게 1975년 열두 살 때 프로 관문을 돌파했다. 지금은 10세 초·중반에 입단하는 기재들도 많지만 당시 12세 입단은 조훈현 9단의 1962년 9세 입단 다음 가는 기록이었다.
1975년 그 무렵은 여섯 살에 일본에 건너가 18세 청년이 된 조치훈이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 도전권을 획득, 타이틀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면서 국내에서는 바둑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조치훈! 조치훈!”하며 열광하던 때였다. 그러던 차에 초등학생 최규병을 본 사람들은 주저없이 “제2의 조치훈”을 연호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와 염원 속에 최규병은 승승장구했는데, 몇 년 후 돌연 모습을 감추었다. 대학 때문이었다. 최규병은 중앙대학생이 되어 나타났고, 다시 승부에 몰입했다. 그러나 성장 도중에 끼어들었던 몇 년의 공백이 최규병의 의지를 따라 주지 않았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국내-국제 기전 본선 이상에서 활약하며 1994년 박카스배 준우승, 1999년 9단 승단 후 맥심배 입신연승최강전 우승, 2000년 맥심배 준우승, 2001년 농심배 한국 대표선수 등의 경력을 쌓긴 했지만, ‘인상적인’ 타이틀에는 이르지 못했다. 승부의 세계는 1등만이 기억되는 승자 독식의 무대. 최규병은 제2의 조치훈이 되지 못하면서 나이를 먹어갔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후진 양성에 눈을 돌려, 요즘은 유창혁 9단과 함께 분당의 바둑도장에서 기재들을 키우고 있다. 2007년부터는 한국리그 영남일보 팀 감독을 맡았는데, 비교적 약체라는 팀을 이끌고 2007-2008 시즌 한국리그 시리즈를 2연패했고 목하 3연패를 바라보면서 ‘명장’ 소리를 듣고 있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