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욕심 버리니 골문이 커지더라”
▲ 지난 12월 22일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MVP를 받은 전북현대 이동국.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시상식이 넘쳐나는 연말이라 인터뷰하기조차 힘들었지만 지난 22일, K리그대상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 만난 이동국은 ‘선수’보다는 ‘모델’의 이미지가 훨씬 강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말수 적은 그도, 이젠 방송용 멘트보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적절히 털어 놓을 정도로 연륜도 쌓여 있었다.
2009 K리그 대상 시상식은 한마디로 이동국을 위한 시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애 처음으로 MVP와 베스트 11, 득점상(20골)을 수상했고, 팬 투표를 통해 최고의 선수로 선정한 ‘팬타스틱 플레이어(FAN-tastic Player)’로도 뽑혔다. 이동국의 수상이 더욱 크게 와 닿은 것은 그의 굴곡 많은 축구 인생 때문이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동국한테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래서인지 이동국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이동국의 재기에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줬다.
시상식 전에 만난 이동국에게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냐고 물었다. 이동국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전성기가 좀 더 일찍 찾아왔다면 좋았을 텐데요”라며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올해가 최고의 해인 것만은 분명해요. 사연이 많았던 것만큼 정말 전북 현대에서는 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든 것들이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물론 지금 현실에 만족하지만, 여기서 안주할 수는 없죠. 올해보단 내년에 더 잘해야 하니까요. 지금의 감각과 실력을 유지하고 더 보완하는 게 저한테 주어진 새해 숙제가 될 것 같네요.”
이동국이 전북에서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거머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난 겨울부터 이어진 쉼 없는 훈련 덕분이었다. 전북 현대의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강희 감독(왼쪽)과 이동국. 박은숙 기자 | ||
이동국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전북 현대에서 보여준 플레이가 이전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 내용들이다.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정말로 최강희 감독님의 신뢰가 저한테 자신감을 심어줬어요. 골을 넣지 못해도 계속해서 경기에 출전시키는 감독님의 배려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선 선수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지도자의 역할도 중요한 것 같아요. 경기장에서 선수가 갖고 있는 실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도록 환경을 편하게 만들어주셨던 부분이 저한테는 큰 힘이 됐으니까요.”
이동국은 전북 유니폼을 입고서야 비로소 골 욕심을 버렸다는 얘기도 털어놓았다.
“어느 팀에서나 이동국은 골을 넣는 선수였습니다. 아니, 꼭 골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제가 처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골을 넣지 못해도, 동료들에게 골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움직임을 많이 생각해 보라고 하셨어요. 즉 제가 슈팅할 수 있는 위치라고 해도 다른 선수들이 좀 더 좋은 자리에 있으면 확실한 골을 넣을 수 있게끔 패스해 주라는 주문이셨죠. 그게 ‘희생정신’이라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그 후로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어요. 저 또한 무조건 좋은 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 좋은 공간을 만들려고 움직이게 되더라고요.”
최강희 감독은 “잘생긴 선수가 운동을 못하면 잘생긴 것까지 비난을 받지만, 잘생긴 선수가 운동까지 잘하면 외모가 더 빛을 발한다”면서 “동국이가 짧은 시간에 부활해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 또한 세트로 비난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라고 웃음을 터트렸다.
“동국이가 십자인대를 다치면서 2년 반 동안 90분 경기를 지속적으로 나가지 못했어요. 당연히 경기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동국이의 장기인 득점 감각이 나올 수 없는 상태였어요. 제가 한 거라곤 꾸준히 경기에 내보낸 것밖에 없습니다. 특히 동국이의 부활 이면에는 우리팀의 보조자인 최태욱, 루이스, 에닝요라는 특급 도우미들의 활약이 뒷받침된 부분이 커요. 그들과의 조화가 동국이의 부활에 단초를 제공했고, 동국이 또한 이전과는 다른 열린 마인드로 팀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해갔어요.”
▲ 이동국 사진제공=전북현대 | ||
“최악의 순간은 9월 12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FC서울과의 경기였어요. 그날 경기 결과에 따라 리그 선두가 결정되는 탓에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했거든요. 경기 자체는 너무 재밌었어요. 단, 우리가 먼저 선제골을 넣었다가 역전패하는 바람에 아쉽게 FC서울에 선두 자리를 내주는 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물론 우리가 정규리그 1위로 마감하면서 그 아쉬움이 묻혀졌지만 아마 1위를 못했다면 그 경기가 두고두고 머릿 속에 남았을 거예요.”
이동국에게 ‘한’으로 남아 있는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항상 대표팀에서 제외된 채 주변부만을 맴돌던 그가 이젠 당당히 대표팀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실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오랜만에 대표팀에 들어갔을 땐 상당히 어색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익숙해졌죠. 어린 선수들이 굉장히 적극적이에요. 이전에는 선배들이 어려워서 말도 못 붙였잖아요. 지금은 먼저 다가와요. 거리낌이 없는 거죠. 그런 분위기가 좋더라고요. 저도 나이를 먹었는지, 후배들과 대화하는 게 재밌어요. 소속팀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젊은 선수들과 노장 선수들(이동국은 스스로 자신을 ‘노장’이라고 표현했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 훈련 분위기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사연이 많은 남자’ 이동국한테 2010년은 그래서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소속팀의 아시아챔피언스리그도 너무 중요한 대회이고, 또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해 좋은 기량을 펼쳐보이는 부분도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K리그 경기와 챔피언스리그, 대표팀 전지훈련과 평가전 등 경기가 굉장히 많아요. 어느 해보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대표팀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아요. 그런 선수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다는 것도 저한테는 굉장한 행운이죠. (월드컵 무대에 서는 게) 저한테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월드컵과 이동국을 떠올릴 때 더 이상 이동국이 불쌍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웃음).”
참으로 어렵게 대표팀에 복귀한 뒤 소속팀으로 돌아와선 잠시 흔들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순간적으로 최강희 감독을 긴장시켰지만 이동국은 알아서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전년도 MVP 수상자의 자격으로 이동국에게 MVP 트로피를 안긴 이운재한테 시상식이 끝난 후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었다. “운동하다보면 나쁠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다. 동국이라면 충분히 MVP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오랜만에 대표팀에서 만나 기분 좋았다. 지금보다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더 발전하는 동국이가 되길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도 덧붙였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