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타고 내려와 ‘잠수함’ 타고 사라져
홍기택 부총재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4조 원짜리 AIIB 한국 몫 부총재직을 잃게 됐다. 박은숙 기자
“자리가 작아서 나갔다.” 홍기택 부총재의 ‘잠행’은 정치권에서도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일각에선 홍 부총재 개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며 앞서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AIIB 부총재라는 직이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였다. 국회의 한 비서관은 “홍 부총재가 산업은행 회장 시절에도 자리를 맘에 들지 않아 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는 홍 부총재의 이른바 ‘서별관회의 폭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홍 부총재는 지난 6월 8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우조선해양 지원은 서별관회의에서 결정했고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말해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서별관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친박 실세 최경환 의원에게로 야권의 공세가 집중되자 홍 부총재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야당은 서별관회의의 폐쇄성을 문제 삼으며 회의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여당은 홍 부총재의 개인적 주장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중국에서 압력을 행사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실제로 홍 부총재는 주변에 “중국 측에서 휴직 형식으로 나를 자른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이 대우조선해양 부실 관리 및 분식회계와 관련해 한국 검찰의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부총재직을 수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며 압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부총재직 인선 과정에서 중국의 진리췬 AIIB 총재는 당시 내정자였던 홍 부총재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홍 부총재는 지난해 9월 9일 사실상 비공식 면접을 겸한 자리에서 진리췬 총재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그런데 당시 홍 부총재는 면접을 썩 잘 보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에서도 “홍 부총재는 힘들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적극 후원한 결과 홍 부총재는 예상을 깨고 발탁됐다. 홍 부총재는 지난 2월 ‘최고 리스크 책임자(CRO)’로 선출됐다. 5명의 부총재 가운데 서열 3위로, 투자와 재무 위험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총괄하는 자리다. 그러나 홍 부총재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홍 부총재 개인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AIIB 측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홍 부총재의 전력과 관련해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면서도 “이런 문제들은 그가 AIIB에서 하는 업무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일단 정부는 홍 부총재와 선을 긋고 나섰다. 6월 29일 기획재정위원회 상임위에 참석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홍 부총재 인선 과정에 대해 “개인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며 “누가 추천했는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는 자칫 박 대통령에게로까지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홍 부총재 인선에 박 대통령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박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도 AIIB 부총재 임명에 있어서 협조를 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AIIB에 37억 달러라는 거액의 분담금을 내는 것 역시 박 대통령 재가 없인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인수위원을 거쳐 산업은행 회장을 맡았던 홍 부총재는 금융권에서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스탠스에 대해 야당에서는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한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로는 대통령의 것이고 과실은 개인의 것이라는 현 정권의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는 국민 불신만 가져올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이라는 부실기업의 리스크관리를 하지 못한 인사를 AIIB 리스크관리 부총재로 임명했다가 부총재직마저 없어지게 만든 박근혜 정부의 인사 참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또한 소극적인 정부의 대응을 지적했다. 김 의원은 “AIIB 부총재직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국익과 국가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자리임에도, 홍 부총재의 이탈과 후임자 인선 과정에서 정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AIIB를 통한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노력과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말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