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동 실종사건’ 공범들 모르쇠·떠넘기기…이번엔 진실 밝혀질까
2011년 9월 19일. 필리핀 마닐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아들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급하게 1000만 원을 마련해 아들이 불러준 계좌로 보냈다. 이후 아들은 빨리 집으로 가고 싶다며 비행기 값 80만 원을 달라고 했지만 이미 어머니의 수중에는 남은 돈이 없었다. 어차피 왕복 비행기표를 미리 예매했던 터라 22일에는 아들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틀 정도만 더 있으라고 아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그 통화는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가 됐다. 아들은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 실종 3년 만에 시신으로
납치된 아들 홍석동 씨(당시 29)의 시신은 실종 3년 만인 2014년 11월, 필리핀 마닐라 시 외곽의 한 주택 마당에서 발견됐다. 홍 씨 외에도 2011년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실종됐던 전직 공무원 김 아무개 씨(50)의 시신도 함께 발견됐다. 시신이 발견된 주택은 홍 씨를 납치해 살해한 일당 최세용(50), 김종석(2012년 사망), 김성곤(44)의 은신처였다. 2007년 7월 9일 안양 환전소 여직원 강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 사건 이후 곧바로 필리핀으로 넘어가 한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납치 강도 행각을 벌여왔다. 홍 씨 역시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최세용 일당 수배전단.
2~3일 정도 함께 여행한 뒤에는 공범들과 함께 납치범으로 돌변해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수법이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인 피해자만 약 19명에 이르렀다. 피해 금액은 6억 원 상당이었다. 이 가운데 사망 또는 실종돼 생사가 불분명한 이들도 4~6명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인 관광객 등을 상대로 납치 강도, 살인행각 등을 벌여온 이들에게는 ‘필리핀 살인기업’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홍 씨 역시 2011년 9월 필리핀 여행 중 마닐라의 한 호텔에서 최세용 일당을 만났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홍 씨에게 미성년자 현지인 여성과 성관계를 맺게 한 것도 협박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필리핀 법 상 미성년자와 성관계 혹은 성매매를 할 경우 징역 10년이 선고될 수 있다. 이에 겁을 먹은 홍 씨가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1000만 원을 부쳐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첫 번째 금품 요구였다.
홍 씨가 마지막으로 요구했던 비행기 값 80만 원 이후, 이들이 협박의 전면에 나선 것은 홍 씨가 납치된 지 약 40여 일 만이었다. 이전까지는 홍 씨가 전화를 했지만 일당이 나서기 시작하면서 홍 씨의 부모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11월 초 새벽, 이들은 홍 씨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1000만 원을 달러로 입금하라고 협박했다. 전화를 받은 홍 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는지 알아야 돈을 줄 것이 아니냐”라며 항변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상대방은 “미안하지만 죽었다”라고 답했다. 아들은 이미 죽었으니 뼈라도 찾아가려면 돈을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이후 돈을 받지 못한 이들은 홍 씨의 부모와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홍 씨의 부모는 아들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 이어진 체포에도 “홍석동 모른다”
최세용 일당 가운데 가장 먼저 검거된 인물은 일명 ‘뚱’으로 불렸던 공범 K 씨(당시 19)였다.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사건 이후 이들의 범행에 가담한 K 씨는 애초에 납치사건 피해자였다. 최세용 등은 납치해서 돈을 뜯어내려다가 K 씨에게서 나올 게 없다는 걸 알자 납치사건의 공범으로 만든 것이었다. 홍 씨의 사건에 K 씨 역시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12월 14일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의 한 PC방에서 검거됐던 K 씨는 이후 한국으로 송환돼 강도살인 등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내내 K 씨는 홍 씨의 생사에 대해서 함구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 씨 사건에는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김종석과 김성곤이 깊숙이 관여했을 뿐, 가장 나이가 어렸던 K 씨는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홍 씨의 생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일당의 ‘머리’ 노릇을 했던 최세용과 행동대장 김종석의 체포가 시급했다.
이후 K 씨와 같은 날 필리핀 경찰에 검거됐으나 12일 뒤 탈옥했던 김성곤이 다시 경찰에 체포됐다. 공범 중 두 명이 경찰에 붙잡히자 불안했는지 2012년 6월 19일 김종석이 홍 씨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금품 요구 전화로부터 약 7개월 만이었다. 김종석은 어머니에게 홍 씨를 찾아줄 테니 500만 원을 부칠 것, 언론사에 자신의 정보를 흘리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K 씨도, 현지 경찰에 잡혀 진술서를 썼던 김성곤도 홍 씨의 생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던 중이었다. 아들이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싶어하던 어머니에게 김종석 역시 홍 씨가 살아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않았다.
금품 요구 시도가 실패한 뒤, 2012년 10월 8일 필리핀 현지 경찰에 검거된 김종석은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홍 씨의 생사를 확인하는 길은 다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 ‘머리’의 송환
그런 가운데 일당의 ‘머리’인 최세용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최세용의 부인이 2012년 5월 20일 출국하면서 그와 함께 최세용과 이름이 유사한 여권을 가진 인물이 입국한 사실이 확인된 것. 한국 경찰청과 태국 이민청의 공조를 통해 최세용이 비자갱신을 위해 3개월마다 이민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같은 해 11월 3일, 최세용의 부인이 이민청을 방문하자, 이민청 직원이 그를 미행해 태국 치앙라이 시내의 한 카페에서 부인을 기다리던 최세용을 검거했다.
계획의 주체였던만큼 최세용의 검거는 홍 씨 납치 사건의 진실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세용은 홍 씨의 행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납치됐던 2011년 9월 자신은 필리핀에 있지도 않았으며 일당과 떨어져 혼자 태국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최세용이 태국에 머무르면서 조사가 점점 늦어지자, 법무부는 태국 법원에 최 씨에 대한 임시 인도를 요청했다.
국내로 송환된 최세용에게는 먼저 2007년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사건에 대한 ‘강도살인’ 및 2008~2012년 필리핀에서 범행한 ‘특수강도 및 강도치상’ 혐의가 적용됐다. 이와 더불어 수사기관은 홍 씨 등 이들의 범행에 휘말려 실종됐다가 사망한 피해자들에 대한 ‘강도살인’ 혐의 적용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최세용은 김성곤에게, 김성곤은 이미 죽은 김종석에게 혐의를 떠넘겼다. 마지막으로 김성곤이 2015년 5월 국내로 송환되기까지 이들의 ‘떠넘기기’는 계속됐다.
필리핀 마닐라 시의 한 주택 마당에서 홍석동 씨와 또 다른 피해자 김 아무개 씨(50)의 시신이 발굴됐다. 사진제공=부산지방경찰청
# 시신 발견에서 기소까지
첫 번째로 체포됐던 사건의 공범 K 씨의 감방 동료가 홍 씨의 시신이 필리핀의 한 주택 공사장에 암매장됐다고 제보하면서 2014년 12월 17일 홍 씨의 시신은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종된 아들을 마지막까지 그리던 아버지는 끝내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2013년 1월 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홍 씨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일당의 두목인 최세용에게 강도살인 혐의를 물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검찰 역시 이들의 한국인 관광객 살인 혐의 입증에 자신했다. 그러나 검찰의 추가 기소는 의외로 지지부진했다. 최세용과 김성곤이 홍 씨의 죽음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숨진 지 오래돼 백골화한 시신이었기 때문에 고의로 살해한 것인지 실수로 숨지게 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16일 최세용의 1심에서 홍 씨를 포함한 한국 관광객 4명의 강도살인 혐의는 제외됐다. 보강 수사를 마친 뒤 추가로 기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가운데 부산지검 외사부(부장검사 김도형)가 지난 7월 25일 최세용 일당에게 홍 씨 등 한국인 피해자 2명에 대한 강도살인 혐의를 적용, 추가 기소한 사실이 알려졌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세용 일당이 2011년 9월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에서 홍 씨에게 접근한 뒤 그를 납치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후 이들은 홍 씨의 어머니가 송금한 1000만 원을 받은 뒤,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홍 씨에게 수면제를 먹여 살해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범행의 전말이다.
강도살인의 경우 살인의 고의를 입증해야 한다. 애초에 돈을 받아낸 뒤 죽일 것을 목적으로 홍 씨 등 피해자를 납치했는지 여부가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하는 부분이다. 최세용이나 김성곤이 이 범행에 납치 계획으로만 가담했는지, 직접 살인 지시를 내렸는지 역시 형량 적용에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홍 씨 등 한국인 살인사건과 관련해 강도살인 혐의를 적용, 기소된 것은 최세용이 한국으로 송환된 지 3년 만의 일이다. 사건이 벌어진 날로부터 따진다면 5년 만이다. 더욱이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도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직까지 홍 씨 등 밝혀진 피해자 외에도 실종상태로 남아있는 피해자들이 있다. 검찰은 이들 역시 납치 후 살해당했을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최세용은 2007년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사건(강도치사)과 필리핀 납치 강도 사건(특수강도·강도치상)으로 별도 기소돼 지난해 10월 1심에서 징역 25년을 선고받았지만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범죄와의 전쟁’ 외친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한인사회 기대와 우려 교차 “부패에 대해서 관용은 없다.” “부패경찰관은 자진 사퇴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마약상들을 죽여도 좋다.” 독재자나 할 법한 발언들을 내뱉고도 최고의 지지율을 올리고 있는 인물이 있다. 지난 6월 30일 필리핀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71)다. ‘징벌자(The Punisher)’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그는 이와 같은 범죄와의 전쟁을 말로만 끝내지 않을 것을 화끈하게 밝혔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마약범을 죽여버리겠다”는 그의 말에 겁을 먹은 필리핀 전국의 마약상들과 마약투약범들 6만여 명이 줄줄이 자수하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후 6개월 이내에 범죄소탕’이라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일차적으로 마약사범을 집중 단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2016년 7월 현재 마약상, 마약범 등에 대한 즉결심판으로 사살된 숫자는 300여 명에 이른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지역 별로 수만 명이 투항하는 등 마약관련 범죄 소탕은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필리핀 내 마약 소탕이 종결되면 다음 타깃은 온라인 불법도박이며, 이들에게도 역시 무관용 원칙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한인 사회는 두테르테의 정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최근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필리핀 내 한인 대상 범죄 또한 두테르테의 철퇴를 맞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필리핀에서 살해된 한국인은 2013년부터 2016년 7월 현재까지 총 36명에 달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2012년 이후 해외 교민 피살 사건의 약 40%가 필리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필리핀 내 한인 범죄가 다시 급증함에 따라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전담 처리하는 ‘코리안 데스크’가 중부 세부 등 5개 지역에 올해 추가로 설치되기도 했다. 필리핀 내에서 한국인들은 돈이 많으며 개인 행동을 즐겨한다는 점 떄문에 주요 강력 범죄의 대상이 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필리핀 내 ‘혐한’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는 것도 범죄율을 증가시키는 데 한몫했다. 필리핀 내의 일부 한인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필리핀인들을 무시하거나 폭행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 이 때문에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서는 필리핀을 방문하거나 이미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재력 과시를 하지 말고 필리핀인들을 무시하지 말 것”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놓기도 했다. ‘필리핀 살인기업’ 최세용 일당처럼 교민이 다른 교민이나 한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역시 필리핀 한인 사회의 커다란 그림자였다. 마닐라 시에 살고 있는 한 필리핀 교민은 “두테르테가 집권하기 전에는 저녁에 잠이 들어 아침에 무사히 일어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라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상 일반 국민들은 물론, 한인들에게 실보다는 득이 더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두테르테의 ‘즉결심판’에 따라 처분된 마약범죄자들 가운데에는 일반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다. 정식 재판 없이 곧바로 사살에 이르기 때문에 그가 마약범죄자인지 일반시민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 실제로 최근 마약 사범 소탕에 휘말려 한 무고한 대학생이 즉결처분을 당하면서 필리핀 사회 내에서도 무분별한 처분 집행에 범죄와는 다른 불안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다른 필리핀 교민은 “무질서한 법 집행에 일반인들이 희생되면서 인권문제도 서서히 제기되는 등 취임 후 약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가 몹시 혼란스럽다”라며 “두테르테의 강력한 범죄 척결은 부패와 범죄가 만연한 필리핀에 꼭 필요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나도 비인권적”이라며 우려했다.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