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은 통했는데…
▲ 지난 19일 한나라당을 나온 손학규 전 경기지사. 친노그룹과 연대에 눈길이 쏠린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친노그룹이라면 열린우리당 내 386그룹이 참여하고 있는 의정연과 개혁성향이 강한 참정연 등을 꼽을 수 있지만 현재로선 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구심력과 결속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런데도 친노그룹이 손 전 지사를 보는 시각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과거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했고, 또 정권을 창출해 봤다는 경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움직임은 손 전 지사의 앞으로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친노그룹 가운데 386세력의 대표격인 이광재 의원은 손 전 지사의 범여권 후보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차기 범여권 후보의 자질에 대해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함께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근무한 경험이 있고,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분배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미래형 지도자의 자질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 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등 ‘빅2’의 정치적 자산과 상당부분 대립된 가치라는 것과 동시에 손 전 지사의 정치적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의원은 “이 전 시장은 실물 경제 개발형 경제리더십의 소유자”라면서 “이런 리더십은 불도저식 개발은 가능할지 모르나, 오늘날 경제정책의 핵심인 미래성장 산업의 동력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특히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현대사회의 과제인 양극화를 해소하고 경제를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생산보다는 분배를 제대로 해내는 리더십이 요구된다”고도 했다.
이 의원이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손 전 지사에게 대입해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경기도지사 재임시절 첨단기업을 유치하는 등 미래형 산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서울대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점 등에서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이 의원은 손 전 지사에 대해 “훌륭한 분이고, (범여권 후보로)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열린우리당 탈당 이후 노 대통령과 서먹해지긴 했지만 친노 인사로 범여권의 흐름에 밝은 중도개혁통합신당모임의 염동연 의원은 “호남이 손 전 지사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나라당 탈당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호남권에서 손 전 지사의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염 의원은 “손 전 지사의 탈당으로 범여권의 활력이 확실히 되살아나고 있다”면서 “그가 앞으로 어떤 정치적 지형을 그려 나가느냐에 따라 (범여권 후보가 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염 의원 역시 손 전 지사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하면서도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권의 대표적 친노 인사이면서 범여권의 잠룡으로 분류되는 김혁규 의원의 손 전 지사에 대한 반응은 다소 싸늘하게 느껴진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경험이 있는 김 의원은 고뇌 끝에 한나라당을 뛰쳐나온 동병상련을 나타내는 선에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그는 “손 전 지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그가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할지, 범여권의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를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 아니냐”고 말했다. 김 의원의 발언에는 손 전 지사에 대한 경계심을 읽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변수는 노 대통령의 입장이다. 노 대통령은 손 전 지사의 탈당을 ‘보따리 장수식 정치’로 비유했다가 손 전지사로부터 ‘무능한 진보의 대표’라는 역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동안 노 대통령 스타일대로라면 손 전 지사를 향해 ‘따질 것은 따져 보자’는 식의 대응이 이뤄져야 맞다. 하지만 이번에 노 대통령을 직접 공격한 손 전 지사에 대해 청와대는 “(보따리 장수식인지 아닌지) 두고보면 알게 될 일”이라며 상당히 점잖은 대응을 했다. 손 전 지사도 “진정성을 갖고 나의 (새 정치를 위한) 진성성을 봐 달라”며 대응수위를 조절했다. 정치권에서는 ‘손 전 지사를 신당의 불쏘시개로 쓰는 것은 몰라도 후보로는 곤란하다’는 노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한 게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도 나온다.
노 대통령의 손 전 지사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장 극렬한 대결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친노그룹에게는 제3지대에 베이스캠프를 준비 중인 손 전 지사의 정치적 역량과 그에 대한 국민적 열망 등을 좀 더 세밀히 체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주요 점검 포인트는 범여권 내부에서 손 전 지사 지지그룹이 형성되고 실제 행동에 돌입하는 단계까지 갈 수 있는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동교동계가 손 전 지사를 보는 시각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인사는 “DJ가 평화민주세력의 단일 후보 또는 후보 연대론을 던진 적이 있는데, 이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단독으로는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담아낼 수 없고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면서 “이런 평화민주세력의 대통합이 손 전 지사가 서 있는 제3지대에서 시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손 전 지사의 지지율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손 전 지사가 대통합신당의 후보로서, 반한나라당의 기수로서 상대를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범여권의 후보군이 죽을 쑤는 상황에서 (손 전 지사가) 후보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현 단계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 손 전 지사 아니냐. 정치는 현실이다. 친노그룹에서도 손 전 지사를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 측도 범여권 친노그룹의 지지를 얻을 경우 상당한 정치적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참 나중에나 생각해볼 일”이라는 입장이다.
지금 손 전 지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탈당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인제 의원 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판단도 있지만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정치풍토를 감안하면 배신자라는 낙인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노 대통령의 ‘보따리 장수’ 비판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담을 넘어서지 않고는 손 전 지사 측이 ‘나중에’ 친노그룹과 큰 길에서 손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손 전 지사의 독자적 정치세력의 모태는 ‘전진코리아’를 비롯한 중도성향 시민사회단체나 재야그룹이 되겠지만 그 후에는 범여권까지 세력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 손 전 지사 측이 친노그룹을 포함하는 범여권과의 정치적 연대나 통합에 대해 “나중에 생각할 일”이라고 말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계산이 맞아 떨어진다면 손 전 지사는 중도실용그룹에 상대적으로 개혁성이 강한 중도그룹까지 흡수해 명실상부한 중도세력의 대표주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의 현실은 가시밭길이다.
손 전 지사와 친노그룹은 어떻게 보면 가장 어울릴 수 없는 집단이다. 그러나 또 한나라당을 뛰쳐나온 손 전 지사로서는 어떤 모습으로든 친노그룹과 관계설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친노그룹과 손 전 지사의 접점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정기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