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수 되려고 범행” 이상한 그 남자 상위 5% 지능 ‘헐’
피해자 김 씨가 거주하던 움막이 있던 자리. 사건 발생 이후 알 수 없는 화재로 폐허가 된 뒤 현재는 풀숲이 우거져 있다.
지난 2014년 6월, 한 남자가 파출소에 들어왔다.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는 “삶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인범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살인범이라고 주장한 남성은 허 아무개 씨(43)다. 사건을 담당한 울산 울주경찰서 박동일 형사2팀장은 “허 씨는 차분했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듯했지만 듣다보면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장황했다”고 말했다.
박 팀장은 이날을 떠올리며 ‘운명’이라고 회상한다. 당시 박 팀장은 남자가 찾아온 앞서의 파출소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사실 이 파출소는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울산 중부경찰서 강력팀장이었던 박 팀장은 울주경찰서로 인사이동이 예정돼 있었지만 울주경찰서 형사 보직이 꽉 차 있어 임시로 파출소에서 근무 중이었다.
박 팀장은 파출소에서 울주경찰서로 옮긴 이후 허 씨를 거의 매일 만났다. 박 팀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허 씨만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의 삶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허 씨에게 “마음이 안 좋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이후 허 씨는 박 팀장에게 늦은 밤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기도 했고, 떠오른 생각들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후 허 씨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범행 사실’에 대해 설명했다. 범행 도구와 당시 입었던 옷은 모두 파기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직접 박 팀장을 범행 장소로 안내하며 당시의 날씨와 도로 상황, 움막까지 가는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김 씨를 살해할 때 사용한 둔기와 가격 부위, 김 씨가 쓰러진 이후 복부를 발로 밟았던 점, 범행 이후 이불을 덮어 놓고 나온 점 등 범행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박 팀장이 직접 지난 2012년 사건 발생 직후 담당 형사들이 작성한 수사 기록과 현장 사진, 기상상태 등을 확인한 결과 허 씨의 진술과 모두 일치했다. 여기에 국과수 심리분석팀이 총 8시간 동안 허 씨를 대면한 이후 ‘국내 상위 5%에 이르는 지능을 갖고 있으며 살인에 대한 진술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소견을 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허 씨는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고 진술했다. 허 씨는 박 팀장에게 “지난 2012년 2월, 옆집 할머니를 뒤에서 야구 방망이로 내려쳐 살해했다”고 주장한 것.
허 씨가 살해했다고 주장한 할머니는 실제로 허 씨의 옆집에 살던 노 아무개 씨(당시 75)로 확인됐다. 하지만 수차례 조회를 해봐도 경찰 신고 접수는 없었고, 사망자 등록도 돼 있지 않았다. 노 씨가 살던 집도 이미 사라지고 원룸이 들어선 상태였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노 씨의 가족은 놀라운 증언을 했다. 사건 당일 노 씨가 쓰러진 것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는데, 의사가 “두개골이 여러 군데 골절돼 있다. 단순히 넘어져서 생기는 부상이 아니니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 하지만 폭행 사건으로 처리되면 거액의 병원비에 대한 의료 보험 적용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일단 어머니를 살리고 생각하자”는 생각에 경찰 신고는 하지 않았다. 노 씨는 뇌출혈로 2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 노 씨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해야 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또 다시 놀라운 일이 생긴다. 노 씨 가족을 만난 이후 수개월 뒤 박 팀장이 동료를 따라 장례식장에 갔는데, 거기에 노 씨의 빈소도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박 팀장은 그 자리에서 가족들을 설득한 끝에 국과수에 노 씨의 부검을 의뢰했다. 앞서의 허 씨 진술에 대한 확인 절차가 대부분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허 씨가 김 씨 살해 직후 범행 도구를 버렸다고 진술한 움막 인근의 강. 박 팀장의 사건 수사가 시작된 이후 경찰과 해병대 전우회가 합동으로 수색했으나 끝내 범행 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앞서의 확인 절차를 거치면서 정황 증거는 무수히 나왔으나 범행에 사용된 흉기나 혈흔이 묻은 옷가지 등, 결정적인 직접 증거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허 씨 사건 수사를 시작한 이후 박 팀장은 그동안의 진술과 사실 관계 확인 내용을 토대로 수차례 체포영장을 청구했지만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허 씨에 대한 수사가 1년 6개월이나 이어진 이유 중 하나다.
오히려 검찰은 박 팀장을 다그치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박 팀장에게 “증거도 없고 횡설수설하다 진술한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기소를 하나”라며 지적했다. 울산지방검찰청의 한 관계자는 “이 사건은 검찰 내부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었다. 회의에서도 의견이 오갔는데, 이날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재판에 넘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박 팀장은 체포부터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허 씨의 돌발행동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허 씨가 밝힌 범행 동기가 ‘울주군수가 되려면 큰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와 자백한 이유에 대해서도 “‘큰일’을 했는데도 군수가 되지 않았다. 사건이 해결돼야만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박 팀장은 “검찰의 입장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법리적으로 봐도 검찰의 의견이 일부 옳다”면서도 “하지만 허 씨의 범행 동기와 자백 사유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뿐이었다. 허 씨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체포, 구속이 이뤄지지 않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추가 범행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찰에 나를 믿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허 씨의 재판은 지난 2월 시작됐고, 법정 공방은 6개월 동안 이어졌다. 허 씨의 변호인이 정신질환과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주장했지만 울산지법은 지난 16일, 허 씨에 대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의 수법과 내용의 잔혹함 등에 비춰 죄질이 불량하고 그 죄가 매우 중하다”며 “살인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가장 중대한 범죄인 점,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점 등에 비춰 보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허 씨가 파출소로 찾아온 지 2년, 사건 발생 4년 만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