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대한생명 인수 성공으로 그룹 덩치를 한 껏 부풀린 한화 김승연 회장이 일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보여 주목받고 있다. | ||
물리적 나이로 보면 그는 젊은 축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덧 한화그룹 총수에 오른지 22년이 지났다. CEO 연령으로 따지면 국내 재계에서 가장 고령자 축에 속한다.
김 회장은 지난해 생애 가장 기쁜 일이 있었다. 기존 그룹 전체의 몸집보다 더 큰 대한생명을 손에 넣은 일이 그것이다. 그 결과 한화그룹은 10대 재벌 반열에서 일약 5대 재벌로 발돋움했다. 자산기준으로 삼성 LG 현대자동차 SK그룹의 뒤를 이어 당당 5위권 재벌로 진입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대한생명은 여전히 많은 부채와 불안한 경영구조를 가진 기업이다. 그럼에도 김 회장이 행복한 것은 기업인으로서 무언가에 도전하고 있다는 무한한 자긍심 때문이다.
20대의 나이에 그룹총수에 오른 이후 김 회장은 몇번 거대한 도전에 나섰던 적이 있다. 명성그룹 인수와 언론사 인수 등이 그것이다. 두 작업은 생각과 달리 퍽 성공적이진 못했다. 개인적으론 불미스런 문제로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에겐 몇가지 인생 원칙이 세워졌다. 필생즉사-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의리, 신의, 성실, 분수 등의 철학이 그것이다. 지난 98년 이후 한화그룹 계열사 사무실에는 필생즉사, 필사즉생이란 글귀가 적힌 액자가 내걸렸다.
97년 몰아닥친 IMF 구제금융시대에 직격탄을 맞아 부도위기에 내몰렸던 김 회장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죽음을 무릅쓸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며 이 표어를 전 계열사 사무실에 비치토록 했던 것. 이후 한화그룹에 이 말은 사시(社是)가 됐다. 그룹사옥까지 팔아치운 한화그룹 구조조정 비결의 알파요 오메가가 바로 필생즉사 필사즉생이었다.
또 김 회장은 듣기에 생경한 의리경영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20여년 전에 약속한 워커 전 대사의 팔순 잔치를 치러준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식의 ‘의리’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구조조정으로 매각된 계열사 직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매수자측에 1백% 고용승계 조건을 내걸었다. 이로 인해 그는 30억원 규모의 손실보전분을 떠안기도 했다.
그는 한화가 운영하는 프로야구단 한화이글스에서 7년전 은퇴한 진정필씨가 백혈병 수술비가 없어 치료를 못받자 수술비 1억여원을 선뜻 내놓았다. 99년 한화이글스가 우승할 당시 유승안 당시 코치의 부인이 사망하자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화에서는 김승연 회장의 이런 스킨십 경영을 강조하며 그가 젊고 거만한 총수가 아니라는 점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그는 신의, 성실, 분수라는 말도 무척 좋아한다. 이 말들은 한화그룹이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한화인의 덕목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김 회장은 신의를 가장 크게 치는 듯하다. 한화이글스의 간판인 송진우 선수가 지난해 4월 개인통산 최다승 기록을 세우자 한화그룹에선 그에게 한화증권주 5천주를 보너스로 줬다. 당시 한화이글스의 황경연 단장은 “한화그룹의 덕목은 ‘신의 성실 분수’인데 송진우는 제1 덕목인 신의에 가장 잘 부합되는 선수여서 구단으로서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느덧 천명을 알 수 있는 나이에 접어든 그의 지금 심정은 어린아이처럼 부풀어 있다. 쌓여진 경륜과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난제를 풀어나갈 지혜도 갖췄다. 지금까지 국내 재계에서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한 역사를 창조하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경영인으로서 김 회장은 2세 경영인이다. 그는 1981년 부친 김종희 전 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그룹총수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의 회장 취임은 국내 기업사에 첫 20대 재벌 총수의 탄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20대 재벌 총수 탄생에 대해 국내 재계에선 기대와 우려가 교차됐다.
그가 77년 한화 계열사였던 태평양건설 이사로 입사한지 4년밖에 안된 일천한 경력을 갖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그룹을 더욱 키워놓는 수완을 발휘했다. 선대 때 합작사였던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과 경인에너지(현대오일뱅크에 흡수합병)의 외국 합작사 지분을 모두 인수해 1백% 경영권을 장악했다.
▲ 지난 99년 청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30대 그룹회장 단의 오찬간담회에 참석한 김승연 회장(맨 오른쪽). | ||
‘20대 재벌총수’라며 어린아이 취급하던 재계 원로들은 김종희 전 회장의 별명인 ‘다이너마이트 김’을 능가하는 폭발력을 보인 김승연 회장의 추진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이어 1990년대 초 경영난에 처했던 경향신문을 인수해 언론사업에까지 자신의 사업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그의 거칠 것 없는 확장 경영은 1992년 10월 그의 회장 취임 10주년을 맞아 단행된 그룹이미지 교체(CI)로 일단 끝을 맺었다. 한국화약그룹에서 한화로 그룹 사명을 바꾼 것.
이후 그에게는 뜻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1993년 11월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인지 김 회장은 90년대 초 중반을 긴 외유와 친동생 김호연 빙그레 회장과의 지루한 송사에 시달렸다. 재산다툼이 원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찾아온 IMF 사태는 김 회장에게 큰 시련을 요구했다. 물론 IMF는 모든 기업들에게 위기를 안겼다. 기업인수 등으로 부채가 많았던 한화는 IMF의 직격탄을 맞으며 휘청거렸다.
김 회장이 벌여놓은 레저사업이나 유통사업은 투자비와 관리비 부담이 컸지만 언젠가 대박의 꿈을 실현시킬 미래사업에 속했다. 거꾸로 말하면 현재는 돈이 안 벌린다는 얘기다. IMF 이전 한화는 계열사 32개 기업의 자산규모가 12조원이었음에도 빚이 8조원에 달했다.
1997년 8월 빙그레 유도선수단 해체 발표가 자금악화설 확산의 빌미였다. 그때부터 외국계 금융기관의 무차별 여신회수가 이어졌고 이는 국내 금융기관으로 다시 도미노처럼 확산됐다. 98년 6월까지 금융기관들이 한화에서 회수한 여신은 1조5천억원. 1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1조원이 넘는 여신을 회수해간 것은 한화를 거의 빈사상태로 몰아넣었다.
김 회장도 경영권 포기각서를 쓰고 집문서도 담보로 넣었다. 중구 장교동 그룹 본사 빌딩도 매각했을 정도였다. 김 회장은 계열사 매각으로 이 위기에 대응했다. 다행히 달러박스로 불리던 한화의 기계사업은 외국사들과의 합작사가 많았던 관계로 지분매각 형식이라 작업이 순조로웠다.
이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한화는 97년말 부채비율 1천2백%에서 99년 2백% 이하로 떨어졌다. 이 과정에 대해 김 회장은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대에 올라 갈비뼈를 하나 들어내고 폐 하나를 잘라낸다면 이 정도로 아팠을까? 회사에서 밤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요일에는 직원들 모르게 출근했다.
아파트 한 채를 팔려고 해도 수개월이 걸리는데 하물며 수천억원짜리 회사를 팔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검토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하고 발에 물집이 생겨 터질 정도로 뛰었다. 1년 6개월 동안 체중이 5㎏ 넘게 빠졌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김 회장은 공식석상에서 다시 웃을 수 있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로 구조조정 모범 기업인 13명을 초청해 격려하는 만찬모임을 가졌다. 김 회장은 그때 김 대통령 바로 옆에 앉아 활짝 웃을 수 있었다. 1992년 한때 영어의 몸이 되면서 문제 기업인으로 낙인 찍혔던 오명을 벗는 순간이었다.
그의 회한은 남달랐다. 그는 청와대 초청모임에서 “한화기계와 에너지는 선친으로부터 승계받은 것인데 선친의 사업을 지켜내지 못해 고통스러웠다”며 끝내 고개를 떨궜다. 2세 오너경영인으로서 20여년 동안 수성과 확장이라는 단맛과 쓴맛을 다 본 그가 못내 아쉬워하는 부분이 바로 선대의 가업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움츠렸던 몸을 다시 폈다. 구제금융시대와 구조조정은 오히려 그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한화를 추스른 그는 지난 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함으로써 한화를 국내 재벌 랭킹 5위에 올려놓았다. 대한생명 인수는 그가 회장 취임이후 한화의 방향으로 설정한 금융과 유통, 레저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 것.
대생 인수로 한화의 그룹 매출에서 금융과 레저 비중이 이제는 50%가 넘게 됐다. 또 그동안 적자 사업이라고 뒷말을 들었던 레저사업군의 중심축인 한화국토개발이 1~2년전부터 흑자기조로 돌아선 것도 김 회장에게 힘이 되고 있다.
어찌 됐든 기계와 화학 분야에서 출발했던 한화가 창업 50년 만에, 김 회장 취임 20년 만에 대생을 인수함으로써 완전히 체질이 바뀐 것이다. 게다가 구조조정이 김 회장에게도 오히려 득이 된 듯하다. 구조조정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전경련 기업구조조정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최근에는 폭넓은 미국 공화당쪽과의 인맥을 바탕으로 우리 정부의 대미 외교를 지원하고 있다.
2001년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그는 재계의 틀을 넘어 미국 공화계의 한국쪽 인맥 간판으로 떠오른 것. 선친 김종희 회장 때부터 닦아놓은 미국 군수재벌이나 보수파 정계인맥과의 친분이 미국 보수파와 별다른 인맥이 없는 국내 집권당과의 매치메이커 역할로 빛을 발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한국측 재계 인사를 대표해 초청받았고, 지난 1월28일 부시 대통령의 상하원 국정연설 발표회에도 직접 참석해 연설을 들었을 정도로 그는 미국 공화당과의 인연이 깊다. 이 행사에는 그가 지난 2001년 미 보수파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헤리티지재단과 함께 만든 한미교류협회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것.
그의 공화당 인맥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의 팔순 잔치를 들 수 있다. 워커 전 대사는 5공화국 시절 주한 미국 대사를 지냈다. 김 회장의 선친인 김종희 회장이 82년 환갑을 맞는 워커 대사에게 한국식 환갑잔치를 열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환갑을 1년여 앞둔 지난 81년 갑작스레 별세했다.
워커 대사의 환갑은 아들인 김승연 회장의 주관 아래 치러졌고 그 자리에서 김 회장은 워커 대사에게 팔순 잔치를 약속했다는 것. 그 약속은 20년만인 지난해 4월 한화 계열의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수십년간에 걸쳐 공화당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는 김 회장 부자의 이런 인맥이 부시 행정부 집권 초기 현 정부와 핫라인을 여는 데 일정부분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생명 인수가 확정되던 날 김승연 회장은 경영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온몸을 바쳐 대생 회생을 위해 일하겠다.” 그는 대생의 본사가 있는 여의도 63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사무실에 체력단련기와 샤워장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대생을 살리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21세기 한국 재계를 이끌 차세대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한 김승연 회장의 향후 행보를 재계는 숨죽여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