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3일 김진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신임각료들과 박관용 국회의장을 찾아가 접견한 진대제 정통부 장관. | ||
그가 장관으로 발탁되자, 그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스개가 오갔다. 요약하면 “그 친구가 무엇이 아쉬워 장관이 됐지?”라는 것이었다. 이는 ‘장관직’을 무시해서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진 장관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삼성그룹의 젊은 직원들은 그를 가리켜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얘기할 정도다. 물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가 그 같은 평가를 받는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평가를 받는 그도 장관이 되고 난 뒤 마음고생이 심하다. 한국 반도체산업을 업그레이드한 인재로 인정받으며, 연봉 50억원대의 신화를 만든 그도 아들 문제로 발목이 잡히고 만 것이다.
진 장관의 자녀는 1남2녀. 그 중 문제가 된 사람은 장남 상국씨(25)였다. 상국씨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병역 기피 논란이 일어 아버지인 진 장관도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결국 그는 진퇴의 기로에 서고 만 것이다.
진 장관은 1952년 1월20일생으로 올해 51세다. 그는 18년 전인 1985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삼성전자에 몸담은 이후 수많은 기록들을 세워왔다. 최연소 이사, 최연소 부사장, 최연소 사장의 기록을 갈아치웠던 것. 특히 반도체 개발전문가인 그는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발판이 된 반도체 개발을 주도했다. 한국 최초로 개발된 16메가D램, 256메가D램, 기가D램은 그의 손 끝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진 장관의 이력서를 보면 장관이 되기 전까지 그가 몸담은 회사는 모두 세 군데였다. 휴렛팩커드(HP), IBM, 삼성전자가 그가 다닌 회사들이었다.
그가 최초로 입사한 HP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미국 스탠퍼드대)에 다니면서 몸담은 회사였다. 당시 그의 직함은 연구원이었다. 이곳에서 2년간 근무한 그는 1983년 박사학위를 받고난 뒤 곧바로 IBM 왓슨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왓슨연구소에서부터 그는 조금씩 두각을 나타냈다. 연구소에 입사하자마자 그는 회사에 “연구소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개발 현장주의를 강조하는 설계팀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 이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의 IBM 생활도 오래가진 않았다. 그는 1985년 10월 삼성전자 미국 현지법인 수석연구원으로 스카우트됐다. 삼성전자에서의 성공신화는 여기서 막이 올랐다.
▲ 지난 2001년 10월17일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오른쪽)과 함께 ‘삼성 홈구축 조인식’을 마친 후 악수하고 있는 진대제 당시 사장. | ||
진 장관의 집안은 평범했다. 그렇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지난 77년 서울대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받은 뒤 그 해 7월 부인 김혜경씨와 결혼했다. 연애로 만난 김씨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 묵묵히 내조하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곧장 미국 유학길에 올라 MIT에서 다시 전자공학 석사를 받았다. 그가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됐기 때문이었다.
MIT 석사과정 1년차에 그는 첫 아들을 얻는다. 요즘 국적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장남 상국씨가 이즈음 태어난 것. 물론 당시로서는 25년 뒤 장남의 국적이 문제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진 장관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진 장관이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딸 때 제출한 논문이 학생들 사이에 필독서로 여겨질 만큼 대단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진 장관의 경기고 동기생에 따르면 진 장관은 고교 시절에는 그다지 특출할 것도 없이 ‘공부만 잘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런 진 장관이 본격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74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부터.
다음은 대학 후배인 박영준 서울대 전기과 교수가 전하는 진 장관에 대한 회고.
“한마디로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사람이었지요. 그는 대학원 시절부터 한국의 전자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남다른 의지가 불탔던 학생이었습니다.”
박 교수는 인터뷰 내내 ‘진 장관’이 아닌 ‘진 박사’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언제였더라. 대학원(서울대)에 들어왔을 때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진 박사가 뜬금없이 ‘땅굴을 알아낼 수 있는 전자회로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70년대 후반 당시 북한의 ‘땅굴문제’가 사회적인 이슈였거든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진 박사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능력을 보여줘 실험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박 교수가 전하는 진 장관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다. 그만큼 진 장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많다는 말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진 장관은 대학원 시절 반도체 실험을 하느라 밤을 새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한다. 특히 리더십이 뛰어나 또래들이 모인 대학원 반도체 실험실에서 맏형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것.
특히 후배들을 배려하는 진 장관의 속정은 모교를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실험실에 편지가 왔어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진 박사의 편지였죠. 후배들과 교수님의 안부를 묻는 것 이외에는 전부 ‘반도체’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그때 진 박사의 반도체에 대한 열망이 어찌나 컸던지…. 몇 차례 편지 내용이 전부 ‘빨리 공부를 마치고 한국기업으로 돌아오겠다’는 내용뿐이었죠. 지금도 그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