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최병모 전 특검, 강원일 전 특검, 차정일 전 특검 | ||
특검팀의 구성 목적 자체가 국민적 의혹 해소에 있기 때문에 특검은 늘 여론의 부담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까닭에 특검 후보를 정해야 하는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는 늘 ‘구인난’에 시달린다.
지난 1999년 전 국민의 관심 속에 국내 1,2호 특검 후보로 추천할 인사 4명을 선정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변협은 우선적으로 자원자를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누구하나 선뜻 나서는 인사가 없었다.
변협 이사진과 전국의 대의원들을 상대로 추천을 받는 작업에 들어갔다. 약 30여명의 인사가 물망에 올랐으나 하나같이 고사했다. “검찰 권한만도 못한 수사권으로 제대로 진실을 파헤치겠는가”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어쩔수 없이 당시 김창국 변협 회장이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을 직접 만나고 다니며 설득 작업을 벌여야 했다. 사실상 국내 특검 1호라고 할 수 있는 강원일 전 특검은 이런 과정에서 마지못해 승낙했다. 당시 강 전 특검은 법조계와 여론이 내세운 특검 적임자 1순위였다. 하지만 그는 검찰에 대한 소신과 자부심이 남달랐기에 결과적으로 검찰을 무력화시키는 특검제도를 찬성하지 않는다고 버틴 것.
“검찰의 존경을 받는 강 변호사가 직접 나서야 검찰의 바로서기도 이뤄지지 않겠는가”라는 김 회장의 몇차례에 걸친 설득에 결국 그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최병모 전 특검 또한 강직함과 원칙주의에서는 강 전 특검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판사 출신인 그가 86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가 “사건 유치를 놓고 변호사들끼리 이전투구하는 모습에 실망했다”며 전혀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내려간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첫 특검인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강 전 특검은 수사 진행 도중 김형태 특검보와 김형완 특별수사관 등이 현직 검사와 공안 출신 변호사 교체를 요구하며 특검팀을 떠나면서 이미지에 큰 흠집을 남기고 말았다. 최 전 특검은 정일순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언론에 중간 수사 결과를 전격 발표하면서 위법 시비를 낳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옷로비 특검팀의 수사 결과에 더 많은 여론의 호응이 이어지자, 한때 검찰 출신 특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검 3호인 차정일 특검팀은 최고의 팀웍을 자랑했다. 부장검사 출신인 차 특검은 선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다소 떨어졌으나 수사 성과는 훨씬 눈부셨다. 2001년 12월 출범한 차 특검팀은 1백5일간 활동하며 이수동 전 아태재단 이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의 비리를 밝혀내 결과적으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 구속으로까지 이어지는 계기를 만드는 등 검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차 특검의 성공을 계기로 변협에서는 수사 능력보다 조정 능력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번 4호 특검 후보 임명 과정에서도 조정과 통합 능력이 뛰어난 송두환 특검과 우정권 변호사를 선정했다. 송 특검 역시 수사팀 선정 과정에서 차 특검의 조언을 많이 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검들은 여론의 중심이 된 만큼이나 정치권의 유혹도 많이 받게 된다. 지난 연말 대선때 세 명의 특검들은 모두 후보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다는 후문이다. 특검으로 인해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이는 역시 차 특검이다. 그는 향후 특검팀이 구성될 때마다 후보 1순위로 항상 하마평에 오르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번 특검 후보에도 차 특검은 물망에 올랐다.
한편 역대 특검들은 이번 ‘대북송금 사건’을 가장 어려운 사건으로 꼽으며, 한결같이 ‘보안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 전 특검은 “대북관계를 고려해서라도 북한의 입장을 생각해줘야 한다.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강 전 특검은 “현 검찰의 조직과 기능으로도 수사가 가능한 것을 굳이 특검까지 간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차 전 특검은 “이번 사건은 이전의 특검과 달리 국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보안유지가 중요할 것”이라며 수사팀의 완벽한 팀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