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채 문광부 장관이 지난 2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 회의석상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응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그의 인품이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또한 정 장관은 민원에 대해서도 개인 이익성 청탁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여권에서는 그의 청탁 개입 논란에 대해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정 장관의 인품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동교동계의 ‘후광’으로 두 번 연속 광주에서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기 때문에 동교동계와는 인연이 남다르다. 그럼에도 지난 2002년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캠프에 전격 합류해 동교동계로부터 ‘배신자’란 오명을 듣기도 했다. 어떤 인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인사 청탁 파문은 오지철 문화관광부 차관이 사표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 될 전망이지만 ‘도마뱀 꼬리 자르기 처리’라는 의혹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과연 그는 이번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해 보고자 한다.
‘정치인 정동채’는 소리가 나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그는 이번 인사 청탁 파문만 아니었더라면 장관 재직 내내 달그락거리지 않으면서도 굵직한 현안들을 처리한 뒤 조용히 물러났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는 정동영 김근태 두 ‘차기’의 입각 여부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릴 때에도 낮은 처신으로 일관했다. 이번에도 입각 사실이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극도로 말을 아꼈고 측근들에게도 철저하게 입 단속을 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일 처리도 이와 비슷하다. 깔끔하고 빈틈이 없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의 ‘2대’에 걸쳐 비서실장을 역임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 장관은 공사를 분명히 하고 올곧은 사람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 평가다. 하지만 동교동계 내부 사정에 밝은 정치권의 한 인사는 그의 품성에 대해 “그를 보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솔직한 사람들과는 안 맞는 스타일이다”라며 “권력의 향방에도 밝은 사람이다”라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이번 인사 청탁 파문에 그가 관련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도덕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전망이다.
‘정치인 정동채’가 오늘날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고비와 고독한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그의 인간됨을 보다 조밀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는 크게 세 번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80년 합동통신 기자시절. 그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76년부터 합동통신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보름만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그는 기자협회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신군부의 보도통제에 대해 검열거부운동으로 맞서다가 결국 보안사 취조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기술자’ 이근안에게 물 고문 등 무수한 폭행을 당한 뒤 직장에서도 강제 해직되었다.
▲ 지난 2001년 정동채 장관이 정풍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그에 대한 평가는 동교동계와 ‘정풍파’ 사이에서 극과 극을 달렸다. 지난 2002년 한화갑 의원(오른쪽)과 담화하는 정 장관.(아래) 정동영 장관과 함께. | ||
그는 인생의 첫 기로에서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신군부의 언론 검열에 맞서 저항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81년부터 83년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신문사(교포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그 뒤 87년 귀국 전까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망명하면서 만들었던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서 김대중 이사장의 공보비서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동교동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정치권 관계자 A씨는 “그가 당시 DJ 비서진에 합류한 것은 경희대 동창인 둘째 아들 김홍업씨의 소개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했다.
87년 귀국한 그는 88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게 된다. 제2의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것. 93년까지 정치부 차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 뒤 그는 94년 1월 아태재단이 공식 출범하면서 김대중 이사장이 그를 다시 불렀다. 그는 처음 DJ의 제의를 받고 ‘언론인의 길을 갈 것이냐, DJ의 통일문제 연구를 돕느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태재단 쪽을 선택하게 된다. 이때가 그의 두 번째 선택의 순간이었다.
당시 DJ는 정치은퇴를 선언한 뒤 칩거를 하다가 아태재단 창립을 계기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때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 진정한 벗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DJ 캠프에 합류했다고 한다. 인생의 두 번째 선택도 편안한 길은 아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나섬으로써 희망이 있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가 동교동계의 핵심으로 ‘직행’할 수 있었던 데는 DJ와의 오랜 인연이 큰 작용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부친 정순석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직후 귀국해 경찰에 투신했는데 목포에 부임하면서 당시 해운업을 하고 있던 DJ와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정치권 관계자 A씨도 이에 대해 “DJ가 목포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을 때 정 장관 부친이 DJ의 어려운 사건 하나를 잘 봐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이 친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아태재단 부이사장이었던 김홍업씨가 정 장관의 경희대 동창이었던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DJ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남다른 성실함과 신중한 업무처리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는 이후 97년 11월 대통령 선거 직전 유재건 의원에게 배턴을 넘겨주기까지 3년6개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최장수 비서실장 기록을 세운 것이다.
정 장관은 96년 5월 DJ의 공천을 받아 국민회의 후보로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하게 된다. 이때 정치권에서는 정치 경험이 전무하면서도 기획력과 성실함을 높이 산 DJ가 그의 정치권 입문을 직접 챙겼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당시 정동영 대변인과 함께 ‘일산 조찬’의 고정멤버이기도 했다.
정 장관은 이런 DJ의 신임 덕분에 16대에서도 광주에서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97년 대선 중 TV선거대책단 후보연설팀장으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를 했다. 그리고 문화관광부에서만 8년 동안 ‘내공’을 쌓아 이번 문화관광부 장관 취임도 그에게는 ‘준비된’ 자리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