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재 전 파스퇴르 회장이 신문광고를 통해 민사고를 선전하고, 생활한복에 일제시대 교복풍의 모자를 쓴다고 해서 ‘시대착오적인 신기한 토픽’으로 다뤄지는 것을 보고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교 2년 뒤부터 KAIST나 코넬대나 MIT 등 유명대학에 졸업생이나 수료생이 줄줄이 진학하는 것을 보고 일반의 관심이 폭발했다.
그러면서 다산 정약용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워놓은 학교, 학교 진입로에 세워진 노벨상 수상자를 위한 15개의 직사각형 동상 좌대, 영어 상용 정책, 그리고 생활한복을 입은 학생들의 존재가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물론 진학을 앞둔 학부모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국 대도시 학원가에도 민사고 입시반이 들어설 정도였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에 위치한 민사고. 단일 고등학교로는 국내 최대 크기인 38만 평의 부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그 옆에 자리잡고 있는 파스퇴르유업 공장터와 맞먹는 규모다.
민사고의 교직원은 90명이다. 이중 64명이 교원이다. 민사고의 학생수는 1백73명. 수업당 학생수는 대부분 15명을 넘지 않는다. 학생과 교사의 비율이 5 대 1을 넘지 않는다. 실험 위주의 과학교육과 토론 위주의 수업, 영어를 일상용어로 쓰는 기숙사 생활. 전국에서 학교 석차가 한자리수를 넘지 않는 학생들끼리의 입학 경쟁.
민사고의 성공담은 이런 배경으로 태어났다. 민사고는 개교 초기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재학생 전원을 기숙사 생활을 시킨다는 것도 화제였고, 생활한복을 입히는 것도, 일반고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봉급을 주고 우수 교사를 유치해 인근 원주에 사택을 따로 마련해주는 등 파격적인 지원이 많아서 화제가 됐던 것.
하지만 민사고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96년 1기 입학생 30명 중 19명이 학교를 중도에 떠났고 특수목적고 출신에 대한 내신특례조치가 폐지되면서 상당수 학생들이 다른 일반학교로 떠난 것. 게다가 개교한지 2년 만에 IMF사태가 터지면서 민사고의 젖줄인 파스퇴르유업이 98년 1월 부도가 난 것.
그러면서 운영자금 조달이 막혀 교직원 봉급이 수개월씩 밀리기도 해 학부모들이 돈을 걷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부도와 함께 물러났던 최 전 회장이 파스퇴르에 복귀하면서 경영은 정상화됐다.
현재 민사고 재학생들은 한 달에 80만원의 기숙사비와 22만원의 수업료, 20만원의 특기적성비를 내야 한다. 거의 대학교 수업료와 같은 수준인 셈. 하지만 학교쪽에선 각종 장학금 혜택이 있기 때문에 입학생 중 학비가 없어서 배움을 이어가지 못하는 학생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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