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노이즈마케팅’ 여론의 방향을 돌려라
▲ 지난 17일 언론인과의 대화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의 ‘헌풍’ 카드는 정치권을 일순간에 블랙홀로 빠뜨리고 있다. 노 대통령이 개인자격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헌재 결정까지는 최소 한 달, 최대 6개월가량 걸린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선관위의 옐로카드로 자칫 레임덕에 빠질 수 있었지만 절묘한 승부수로 시간적·공간적 입지를 확보한 셈이다. 노 대통령이 무리수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헌법소원제기라는 ‘헌풍’ 카드를 꺼내든 1차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현직 대통령의 헌법소원 청구가 치열한 법리 공방과 비판 여론에 직면할 것이란 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청와대가 선관위 결정에 대한 법적 대응 카드로 헌법소원과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놓고 고민해 온 것이나 헌법소원의 당사자를 ‘대통령’이 아닌 ‘개인 노무현’으로 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치열한 법리공방과 여론의 뭇매를 감수하면서도 청와대가 결국 헌법소원 카드를 꺼내든 것은 그러한 공방과 여론의 뭇매를 정치적 논란으로 만들어 대선정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술수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계산은 청와대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당일(21일)에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날 오후 전북 김제의 한 농장에서 열린 농업인 단체장 및 농업 CEO 간담회에 참석한 노 대통령은 “선거 중립이든 정치적 중립이든 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의무를 부여한 나라는 후진국 말고는 없다”며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이 문제는 안 고쳐진다”며 논란을 계속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노 대통령의 속내에 비춰볼 때 그는 헌재의 결정이 날 때까지 거침없는 무한질주를 계속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는 노 대통령 스스로 정국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자 대선정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노 대통령이 작심하고 ‘헌풍’ 카드를 꺼내든 만큼 한나라당 경선 후보들과 범여권 대선주자들을 겨냥한 독설 발언을 계속 이어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21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이 제기한 대운하보고서 조작설과 관련해 거침없이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내가 언제 공작했느냐 나는 공작의 ‘공’자도 모른다”고 반박하는가 하면 “그렇게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부도덕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통령 자격 없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헌풍’ 카드는 범여권 대선구도 및 친노주자 띄우기 플랜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은 20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범여권 차기 후보들 간의 대결구도가 아직 형성되지 못해 청와대가 정치 논란의 중심에 섰다”며 “대결구도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청와대는 정책에 전념하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이 정쟁의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범여권 대선구도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의 입마저 봉쇄되면 대선정국 주도권을 한나라당이 독차지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헌풍’ 카드로 정국주도권을 어느 정도 확보한 만큼 범여권 세력재편 및 대선 진지 구축 과정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 대통령이 ‘친노주자 띄우기’에 올인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대략 9~10월께 헌재의 결정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때쯤이면 한나라당은 이미 대선후보가 결정난 뒤고 범여권 대선구도 또한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한나라당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노 대통령이 의중에 두고 있던 맞춤형 후보를 적극 지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 열린우리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친노주자 띄우기’ 플랜도 물밑 가동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헌풍’ 카드 이면에는 ‘제2의 탄핵기획설’ 등 노 대통령 특유의 승부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과 법조계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들도 헌법소원 청구를 비판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도 노 대통령이 청구를 강행한 배경에는 드러나지 않은 고도의 노림수가 투영돼 있을 것으로 이들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헌재가 각하 내지는 기각 결정을 내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경우 노 대통령은 정치적 타격을 받겠지만 이미 시기적으로 대선 구도가 기정사실화된 이후가 될 전망이다.
노 대통령이 노리고 있는 승부수는 바로 이러한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대선 구도가 범여권에 유리하게 전개돼 있다면 다행이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유리한 형국으로 전개돼 있다면 노 대통령이 중대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시나리오도 상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황우여 사무총장도 22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이제 모든 공무원이 정치적 언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대통령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헌법재판소는 결정으로 노 대통령을 다시 대통령 의자에 올리고 공무원의 정치적 기강을 엄중히 바로 세워야 한다”며 신중한 대응을 주문한 것도 노 대통령의 노림수를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노 대통령의 도발에 발끈해 끌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노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동에 족쇄를 채울 뾰족한 방법도 없다는 데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