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해결사서 ‘배신자’로 전락
▲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6월30일 동생 박용만 부회장의 장남 박서원씨 결혼식 가족사진(왼쪽)에도 찍히지 않아 ‘형제의 난’ 전부터도 형제들과 소원한 관계였음을 짐작케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7월21일 박 전 회장이 형제인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과 박용만 두산 부회장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기 전만 해도 그는 ‘두산 구조조정의 대명사’로 인식됐었다. 하지만 그가 그날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이 그동안 수천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폭로하며 자신이 두산산업개발을 욕심냈다는 형제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형제간의 의를 생각하여 지금까지 참아왔으나 회사가 부실화되는 것을 보다못해 우량기업인 두산산업개발만이라도 독자경영을 건의했을 뿐”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런 그의 주장에 대해 두산그룹의 새 회장인 박용성 회장은 이번 사건이 “(박용오 전 회장의) 두산산업개발 경영권 탈취 미수 사건”으로 정의했다.
박 회장은 박 전 회장의 두산산업개발 경영권 요구가 “자식(박경원)의 개인사업(전신전자) 지원을 위해 많은 지분을 매각해 두산산업개발 지분율이 0.7%밖에 되지 않는 박 전 회장 가족이 두산산업개발을 자신의 가족 소유의로 만들어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주장했다. 박 전 회장의 요구에 대해 박용곤 명예회장이 5월에 가족회의를 소집해 ‘계열분리 불가, 그룹 회장 이양’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형제간 폭로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난 96년 12월 두산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두산의 가장 어려웠던 구조조정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박 전 회장이 왜 형제들을 공격하고, 박 전 회장을 뺀 나머지 형제들은 왜 그를 외면하게 된 것일까.
이번에 서로 기자회견 맞대응을 벌인 박용성 회장이나 박용오 전 회장은 성격이나 화법이 직선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부분에 대해 박용성 회장은 “성격 급하고 기존의 일들을 뒤집어 버리는 게 (부친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림이라는 얘기다. 또 박 전 회장이나 박 회장은 말술로도 유명하다. 박 전 회장은 주량이 ‘됫병 기준’으로 1병반이라는 일화도 전해질 정도다. ‘두주불사’라는 얘기다. 그만큼 활달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라는 얘기도 들린다.
박 전 회장은 두산그룹 회장을 지내면서 프로야구단 OB 베어스 구단주를 지냈고, 현재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최장수 총재로 재임하고 있다. 그가 KBO 총재로 가면서 비워준 OB 베어스 구단주 자리에는 동생인 박용성 회장이 앉았다. 박용성 회장은 국제유도연맹 회장을 맡으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다”라는 말로 유명한 박용성 회장 못지않게 박 전 회장의 말솜씨도 화끈하다. 야구계에선 문희갑씨가 대구시장을 지낼 때 박 전 회장이 KBO 총재 자격으로 대구야구장의 낙후성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거나 신격호 회장이 롯데 자이언츠의 구단주를 맡고 있을 때 신 회장에게 프로야구 인기추락의 책임을 따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은 자신의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구조조정 끝난 두산의 경쟁력을 점수로 매기면 “A- 정도를 주고 싶다”며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너희 그룹 그렇게 어렵냐’고 질문할 때 가슴이 아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룹 창업자이자 그의 할아버지인 박승직씨가 세운 영등포의 맥주공장 터를 팔 때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 구조조정으로 두산은 그의 취임 전해인 95년 7백80억원 적자에서 99년 5천7백50억원 흑자로 바뀌었다.
두산그룹이 창업 백년을 맞던 해에 형인 박용곤 명예회장으로부터 그룹 회장을 이어받아 구조조정에 성공한 것이다.
▲ 박용성 두산 회장의 반박 기자회견. | ||
하지만 박 전 회장의 두산산업개발지분은 최근 2~3년 사이 계속 줄었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박 전 회장이 아들 박경원 전신전자 부회장의 개인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두산 계열사 지분을 매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두산의 이런 주장에 대해 박경원 부회장은 부인하고 있다. 부친으로부터 도움받은 적도 없고, 두산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신전자가 부실회사가 아니라 부채비율이 27.4%에 불과한 우량회사라는 해명서를 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두산쪽에서 이번 사태가 나기 전에도 전신전자나 박 부회장에 대해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 부회장이 2002년 전신전자를 인수할 무렵 그는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관계기관에 불려다녔다. 당시 두산쪽 반응이 ‘강 건너 불구경’이어서 재계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재벌 회장 아들이 관련된 일에 그렇게 ‘쿨’한 자세를 취하는 예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박 부회장은 ‘형제의 난’ 불씨를 제공한 것이 “작은아버지들인 박용성-박용만 형제의 욕심”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박 전 회장의 주장과 비슷하다.
재미있는 점은 박 전 회장이 박용성-박용만 라인의 경영비리를 비난해도 박용곤 명예회장에 대해선 아무런 비리의혹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룹의 좌장격인 박 명예회장에게 나름의 예의를 갖춘 셈이다.
두산 창업주 3세대 용(容)자 돌림 6형제는 지난 96년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박 명예회장의 “다 팔아서라도 기업을 살리자”는 말에 동의를 하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넘겼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시기를 넘기자 형제간 균열로 더 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특히 박 전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최근 몇년간은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 2002년 아들인 박경원 부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는 등 구설수에 오른 데 이어, 지난해엔 부인 최금숙씨의 타계, 올해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급기야는 ‘진실’을 밝힌 대가로 두산그룹 경영일선에서 쫓겨나 검찰 수사까지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박용오 전 회장의 좌우명은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이다. 그의 ‘부지런함’이 보상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