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에 울다 판도라상자 포장 뜯었나
▲ 공운영씨에게 미림팀은 ‘양날의 칼’이었다. 잘나가는 비밀부서였지만 언제든 문제가 되면 버림받을 수 있는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다. 사진은 자해소동으로 분당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던 공운영씨가 지난 4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병원문을 나서는 모습. 이종현 기자 | ||
그런데 이번 사건을 되짚어 보면 MBC 이상호 기자가 불법 도청 테이프의 제보를 받고 “몹시 흥분하면서 ‘충분한 보도감이다’라며 적극적인 보도 의사를 나타냈기 때문에”(국정원 발표) 결국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는, 공운영이라는 전직 정보요원의 비밀 도청 테이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불행한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 어떤 이유로 공운영씨는 무덤까지 지고 가야 할 정치 정보들을 가지고 국정원과 협상을 하고, 급기야 그것을 공개해야만 하게 됐을까. 공운영 58년 삶의 궤적을 통해 그 해답을 추론해본다.
“만약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국정원(99년 1월 개칭, 당시에는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5백여 명을 직제개편이라는 명목으로 무차별 해고하지 않았다면 이번 X파일 같은 사상 초유의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공운영씨의 경우 감찰실 출신으로, 위로부터 상당히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도청과 같은 위험한 일을 함에도 엄정한 기준 없이 단칼에 날려버리자 공씨가 매우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안다.”
지난 정권 때 해직된 한 전직 국정원 인사의 말이다. 이 인사에 따르면 정보 요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정보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는다고 한다. 전현직 국정원 요원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 통분하는 것도 이번 사건에 연루된 공씨 등이 자신들의 제 1수칙인 비밀 유지 원칙을 깨고, 그것도 모자라 정보를 팔아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점이다. 공씨도 25년 가까이 정보요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랬던 그가 왜 자신의 ‘정보’를 무기로 ‘장사’를 하려했던 것일까. 공씨의 인생 항로를 토대로 그 해답을 찾아보자.
공운영씨는 지난 1947년 3월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에서 출생했다. 8남매 가운데 다섯째 아이였다. 공씨는 당시 대부분의 집안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린상고 2부(야간)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선린상고는 가난한 학생들이 졸업 뒤 바로 취직을 하기 위해 진학하던 학교였다. 공씨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학교에 다니던 고학생이었다.
그는 1966년 선린상고를 58회로 졸업하게 된다. 하지만 곧바로 취직이 안 돼 해병대에 입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973년 경 중앙정보부 공채에 합격해 정보맨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선린상고 졸업생 A씨는 “당시 졸업생들은 주로 은행 등에 취직을 했다. 어쩌다 한두 명씩 중앙정보부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부를 썩 잘해서 들어간다기보다, 인맥을 통해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공씨는 어릴 때부터 대식구 속에서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공씨를 어떤 일에 대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지난 1999년 3월 국정원으로부터 갑작스런 직권면직 통보를 받고 대다수의 직원들은 순순히 그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공씨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자술서에서 “퇴직 이후 참담한 심정으로 몇 개월을 소일하다가 생계도 걱정하게 되었다”고 말한 부분은 ‘가난’에 대한 심경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그 뒤 공씨는 중정 입부 뒤 타고난 성실함과 활동력으로 감찰실과 대공정책실 등 주요 부서에서 근무하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공씨를 기억하는 전 중앙정보부 요원 A씨는 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공운영씨는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아 부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특히 공씨는 감찰실 출신인데 그곳은 최우수 자원이 가는 곳이다. 공씨의 정보 수집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성실하고 일도 열심히 했다.”
정보맨으로서 능력을 인정받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한 국내분야 간부가 그에게 미림팀을 ‘재편성’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미림팀 배속이 그에게는 양날의 칼이었다. 잘나가는 비밀 부서에 속했다는 자부심도 컸지만, 그 자부심은 곧 배신감으로 변해갔다. 다음은 그 일화 한 토막.
▲ 국가정보원 | ||
공씨는 이때 도청과 협조자의 정보 제공 등을 병행하며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혹 송신기가 적발되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담당 국장은 “공 팀장이 공명심에서 자발적으로 한 것으로 처리하자”며 책임을 공씨에게 전가했다고 한다. 이에 공씨는 ‘언제든지 문제가 되면 조직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후에 국정원에 진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공씨는 1992년 12월 미림팀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두 번째 배신감에 빠지게 된다. 그는 미림팀 팀장에 발탁될 때 사무관에서 서기관급으로 승진했으나, 93년 7월 미림팀이 직제에서 사라지게되자 사무관 보직으로 ‘강등’돼 심한 인사불만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불만은 급기야 공씨를 정보요원의 제 1수칙인 비밀 유지를 저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그는 94년 2월 경제과 수집관의 한직을 맡고 있다가 새로 부임한 국내정보 담당 국장에 의해 다시 미림팀 재건 특명을 받는다.
그는 이때 ‘언젠가 또 다시 도태당할 수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불법도청 테이프를 자기 방어수단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국정원 조사 결과 밝혀졌다. 공씨는 1994년 6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3년5개월 동안 자신이 수집했던 테이프 2백74개와 녹취록 등을 집으로 무단 반출했다가 최근 검찰 압수수색 과정에서 그 존재가 드러나 현재 정치권을 패닉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씨의 세 번째 배신감은 98년 4월 미림팀이 정식으로 해체된 뒤 99년 3월 직제 개편에 따라 직권 면직돼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는 자술서에서 “이에 본인은 태연스런 자세를 보이려고 애를 썼으나 내심으로는 ‘이렇게 맡은 일에 대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도태시킬 경우 너도나도 마치 자기들에게 똥물이라도 튈까봐서, 아니면 나를 도태시킴으로써 나에 대한 불씨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분위기가 역겹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직에 대해 심한 배신감마저 갖게 만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공씨는 이런 심경에서 결국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세상에 공개해 일파만파의 파문을 몰고 온 것이다.
이런 공씨의 행태에 대해 전직 정보요원들의 의견은 대체로 비판적이다. 국사모 회장 송영인씨는 “정보기관에 근무한 사람으로서 너무 부끄럽다. 아무리 자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도청 테이프를 그 방어수단으로 삼아야 되겠는가. 김대중 정권 때 수백명이 해고를 당했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없다. 정보요원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다”며 일침을 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국정원의 전직 요원 관리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지 알 수 있다. 최고의 정보 기관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위기 관리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세계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반응도 있다.
공씨의 뒤틀린 피해의식과 그것을 간과하고 방치했던 국정원의 무능력이 빚어낸 X파일 사건, 대한민국 정치판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