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의 장수로… 투항 또는 계산
▲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여야 정치권과 잠룡들은 벌써부터 ‘정운찬 카드’에 따른 손익계산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국민통합형 내각이라며 ‘정운찬 카드’를 환영하고 있지만 박근혜 전 대표 등 차기주자 진영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지되고 있다. 허를 찔린 야권은 ‘어색한 조합’이라며 정 후보자의 선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10여년 전부터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으면서도 소신을 꺾지 않았던 정 후보자가 이명박 정부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충청도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최고 학부인 서울대 총장을 거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총리직에 발탁된 정 후보자의 순탄치 않았던 인생역정을 되짚어 봤다.
정 후보자는 1946년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에 소재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생활할 정도로 궁핍하게 살았다. 쌀밥은 구경조차 힘들었고,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준 옥수수 가루를 넣고 끓인 죽이 주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정 후보자는 어린 시절 딸 부잣집이었던 숙부의 양자로 입적됐으나 생활은 어머니와 함께 했다고 한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고 영장이 나오자 호적상 ‘독자’로 기록돼 있어 징집 연기를 받았고, 최종적으로 징집이 면제됐다. 2007년 대선정국 당시 정 후보자가 대선후보로 거론되자 한나라당은 그의 ‘징집 면제’ 문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인 정 후보자는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경제학자의 꿈을 키우게 된다. 대학 졸업 후 한국은행에 약 1년 6개월간 재직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에 모교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30년 넘게 상아탑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2002~2006년에는 4년 임기의 서울대 총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에 한국은행 총재직을 맡아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지만 고사했고, 노무현 정부 때 개각설이 나돌 때마다 경제관련 부처 수장이나 청와대 경제수석 하마평에 단골로 오르내렸다.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을 때마다 “정년까지 학교에 남고 싶다”며 학자로서의 소신을 중시했다. 정 후보자가 사회적 인지도를 넓히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교수 직선을 통해 서울대 총장에 임명되면서부터다. 그가 추진한 각종 서울대 개혁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다양한 인재선발을 기치로 내걸고 도입한 ‘지역균형 선발제’는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대학자율화를 지키기 위해 당시 현직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한 것도 그의 인지도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교육행정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개혁적 마인드와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정 후보자의 주가는 급등했고, 정치권의 구애공세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 05년 7월 열린 제2회 대학혁신포럼에 참석한 정운찬 서울대 총장(오른쪽서 세 번째) 등 각 대학 총학장들이 대통령 인사말을 듣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당시 여권이었던 민주개혁 진영의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2007년 초에는 전국을 돌며 순회 강연을 펼쳐 대권행 열차에 탑승하기 위한 정지작업에 나선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정 후보자는 복잡한 대권함수와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하면서 2007년 4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세력화를 추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당시 정 후보자가 밝힌 불출마 이유였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에는 여권 일각에서 나돌았던 ‘충청 총리론’과 맞물려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고, 지난해 18대 총선 때도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그는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낀다”며 구애를 거절했다.
그렇다면 30여 년 이상 소신을 지키면서 정치권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 온 정 후보자가 이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 관계자들은 진보·경제학자인 정 후보자의 개혁 의지와 지역과 이념을 뛰어넘어 ‘탕평’ 정치를 펼치겠다는 이 대통령의 ‘중도 실용’ 의지가 맞물린 결과물로 해석하고 있다. 정 후보자를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은 이 대통령의 뜨거운 구애도 정 후보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이 됐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한 차례 정 후보자를 만나 총리직 수락을 요청한 바 있고,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을 두 차례나 보내 설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정 후보자는 9월 3일 청와대의 총리지명 발표 직후 서울대 사회과학대 세미나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직접 만나뵙고 이야기한 결과 대통령과 경제철학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기본적으로 경쟁을 중요시하고 촉진하되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보살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며 총리직 수락 배경을 설명했다. 이 대통령과 경제 철학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대통령을 보필해 한국을 지금보다 좀 더 강한 경제의 나라로 만드는 게 목표”라는 당찬 포부를 밝힌 셈이다.
어린시절 야구선수를 꿈꿨을 정도로 정 후보자는 ‘야구광’으로 유명하다. 서울대 총장 시절, 퇴임 후 거취를 묻는 질문에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야구 마니아인 그는 지난해 프로야구 정규시즌 개막전 때 야구 해설가로 깜짝 데뷔한데 이어 올해도 개막전 해설을 맡았다.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정 후보자는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처럼 야구에서도 한수 한수 선택의 기회가 숱하게 찾아오고 그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게 정 후보자의 지론이다.
한때 민주개혁 진영의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정 후보자의 ‘이명박호 승선’ 선택이 그의 인생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향후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