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돌렸던 형제들과 죽음으로 손 맞잡나
▲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 4일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월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
고 박용오 회장은 1937년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미국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65년 28세의 나이로 두산산업에 입사하면서 가업에 첫발을 내딛었다. 입사 12년 만인 1977년 40세 나이로 두산산업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오른 고 박 회장은 동양맥주 사장, OB베어스 사장, 두산상사 회장 등을 거쳐 1996년 두산가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에 이어 두산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고 박승직 창업주로부터 박두병-박용곤 회장으로 이어진 장자 승계 체제에서 형제경영 체제로의 첫발을 내딛는 중심에 고 박용오 회장이 있었던 셈이다.
59세 나이로 총수직에 오른 고 박 회장 앞에 놓인 두산의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두산 창업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있던 1995년 두산 안팎에선 “100년은커녕 10년도 못 버틸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경영상태가 악화돼 있었던 것이다. 주력인 맥주사업에서조차 휘청거리던 두산은 강력한 구조조정을 선언하게 된다.
이 같은 제2의 창업 선봉엔 창업 100주년을 맞아 1996년 회장직에 오른 고 박용오 회장이 서 있었다. 고 박 회장은 3M 네슬레 코닥 등의 지분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코카콜라 영업권도 미국 코크사에 넘긴 데 이어 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OB맥주까지 팔았다. 맥킨지의 경영 컨설팅을 받아들여 23개 계열사를 과감하게 4개사로 통폐합하기도 했다. 이 같은 구조조정의 결과 지난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도 두산은 현금배당을 하는 등 여유를 찾게 됐다.
이후 박용오 체제의 두산은 그룹의 차세대 성장동력을 중공업으로 정하고 때마침 공기업 민영화 정책으로 M&A(인수·합병)시장에 나온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쇼핑 리스트에 올리고 2000년 인수에 성공했다. 두산은 이후 2002년 고려산업개발(두산산업개발로 합병),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잇달아 인수하게 된다. 이로써 내수 소비재 그룹에서 중공업과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산업재 그룹으로 탈바꿈하게 된 두산은 2005년 금호아시아나를 제치고 재계 서열 10위에 오른다.
그룹의 주력 사업군을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바꿀 수 있었던 배경엔 고 박 회장 특유의 결단력이 있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한 번 방향을 정하면 연습스윙 없이 곧바로 휘두르는 그만의 골프 습관은 목표를 설정한 후 뒤돌아보지 않고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경영 스타일을 잘 대변했다.
고 박 회장은 그룹 경영뿐만 아니라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그룹의 대외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역임하며 프로야구 발전에 적극 기여했던 그가 사망하자 야구계 전체가 비통함에 빠져들기도 했다. 국제활동도 활발하게 펼치며 한·이집트경제협력위원장과 한·스페인경제협력위원장,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광범위한 대외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했던 탁월한 유머감각 역시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었다.
이런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사라지게 만든 것은 두산그룹 회장 취임 10주년을 1년 앞둔 2005년 7월 터진 두산 ‘형제의 난’ 사건이었다. 박용곤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한 오너 일가에서 고 박용오 회장에게 ‘바로 아래 동생인 두산가 3남 박용성 당시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 총수직을 이양하라’고 통보한 것이다.
▲ 2000년 양국 경제협력 증진 공로로 벨기에 왕립훈장을 받았다.(위 사진)1998년 KBO 총재로 취임해 2005년까지 역임했다. 연합뉴스 | ||
형제경영으로 유명했던 두산가 형제들이 이 같은 파국을 맞이했던 배경을 두고 당시 여러 말들이 나돌았다. 특히 고 박용오 회장에게 총수직 이양을 요구한 연유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박용곤 명예회장이 동생인 고 박 회장에게 “취임 10년이니 그만 은퇴하라”고 설득했지만 고 박 회장이 끝내 이를 거부했다는 정황만 갖고는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고 박 회장이 두산의 새로운 도약 기틀을 닦은 최고경영자(CEO)였음에도 형제경영을 철석같이 지키기 위해 고 박 회장의 용퇴를 종용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음 총수직을 물려받게 돼 있던 박용성 회장과 고 박 회장 간에 불협화음이 생긴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일각에선 한국중공업 인수전 당시 고 박 회장과 찰떡궁합을 맞췄던 박용만 현 ㈜두산 회장이 박용성 회장을 적극 도와 고 박 회장 퇴출과 추후대응을 주도했던 점 때문에 “박용오-박용만 형제 사이의 개인적 갈등이 일을 키웠다”는 미확인 소문을 낳기도 했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맏아들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을 위시한 두산가 4세 경영인들과 달리 그룹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개인사업체를 꾸렸던 고 박 회장 장남 박경원 성지건설 부회장에게 시선이 쏠리기도 했다. 고 박 회장이 독립해 나가 있는 아들을 그룹 차원에서 도우려는 과정에서 다른 형제들과 갈등을 야기했다는 관측이 나돌았던 것이다. 형제의 난 당시 박경원 부회장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작은아버지들(박용성-박용만)에 대한 서운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 박용오 회장은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두산그룹을 중공업과 건설업계 강자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고 한다. 지난해 2월 중견 건설업체 성지건설을 인수하며 경영일선에 돌아온 것도, 두산건설에서 상무까지 지낸 아들 박경원 부회장을 성지건설 대표이사에 앉힌 것도 두산 측에 보란 듯이 전문분야인 건설업에서 재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성지건설은 고 박 회장의 인수 이후로 경기 침체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인수 이전에 비해 실적은 줄고 부채는 늘었으며 주가는 크게 하락했다. 여기에 차남 박중원 씨의 주가조작 혐의 구속기소에 이은 유죄판결이 고 박 회장을 극한의 스트레스로 몰아넣었다.
고 박 회장 장례절차는 두산그룹 차원의 가족장으로 진행됐다. 두산가 맏형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장례를 가족끼리 치를 것으로 권유했고 상주인 박경원 부회장이 이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고 박 회장 영정 앞에 박용곤 명예회장을 비롯해 박용성-박용만 형제와 박용현 현 두산그룹 회장(두산가 4남), 그리고 막내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까지 모인 모습을 본 주변에선 “고 박 회장이 죽으면서 두산가 형제들 화해의 장을 마련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2005년 제명 이후 고 박용오 회장은 두산가와 담을 쌓고 살았지만 형제간 화해 가능성에 대한 관측은 종종 나돌았다. 우선 성북동 S 빌라에 있던 두산가 4형제 공동 명의 재산의 명의 변경과정이 눈길을 끌었다. 고 박 회장이 기거했던 성북동 S 빌라 ○동 ××1호 바로 옆에 붙은 ××2호는 박용곤-박용오-박용성-박용현 4형제 공동 명의 재산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고 박용오 회장이 자신 명의의 빌라 지분(4분의 1)을 맏형 박용곤 명예회장에게 증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앞선 2007년 12월 박용현 회장이 자신의 지분(4분의 1)을 박용성 회장에게 2억 7500만 원을 받고 매각한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자신의 퇴출을 결정했던 박용곤 명예회장에게 자신 명의 지분을 매각도 아닌 증여로 넘겼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9월 모친 명계춘 여사의 별세 당시 고 박 회장과 형제들이 장례식장에서 함께하면서 화해의 물꼬가 트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번 고 박 회장 장례식에도 어김없이 모인 두산가 형제들은 한결같이 상주인 박경원 부회장을 위로하며 다독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선 고 박용오 회장의 유서 내용이 두산가를 향한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고 박 회장은 유서를 통해 성지건설의 재무상태가 어렵다는 점을 호소한 반면 앙금이 남아있을 법한 형제들에 대한 언급은 일절 삼갔다. 유족의 뜻에 따라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고 박 회장이 유서를 통해 두산 측의 재정적 도움을 요청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고 박 회장 죽음이 향후 성지건설 경영을 이끌어가야 할 장남 박경원 부회장과 두산 오너일가가 손을 맞잡을 수 있게끔 만들어준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두산그룹 역시 유동성이 원활하지만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과연 고 박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두산가 형제들 사이에 화해무드가 조성될지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성지건설 향후 경영판도
결국 상속세가 문제...
▲ 박경원 부회장 | ||
문제는 경영권이다. 성지건설의 최대주주는 지분 24.4%(146만 1111주)를 보유한 고 박용오 회장이다. 박경원 부회장 보유 주식은 6만 210주로 지분율 1%에 불과하다. 그밖에 박 부회장 부인 서미경 씨가 6100주(지분율 0.1%)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8월 공시된 성지건설 2009년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한재경 로렌스’란 이름의 한 미국국적 사업가가 주식 33만 6140주(지분율 5.6%)를 갖고 있다. 성지건설 지분 5.4%를 갖고 있던 도이체방크아게런던은 올 초 대부분의 지분을 매각하고 0.7%만 남겨놓은 상태다. 성지건설의 외국인 보유 지분은 약 8%며 대부분 적은 지분을 가진 주주들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 부회장이 선친 지분만 고스란히 물려받으면 경영권 수성에 그다지 큰 문제는 없는 셈이다.
이를 위해선 거액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 그런데 상속세 밑천이 될 수 있는 박경원 부회장 소유 부동산 목록에 거액의 근저당권 설정이 돼 있어 관심을 끈다. 박 부회장 자택인 서빙고동 소재 C 아파트 ×1동 ××01호와 고 박용오 회장이 기거했던 성북동 S 빌라 ○동 ××1호는 박 부회장 명의로, 고 박 회장이 활용했던 S 빌라 ○동 ××2호는 고 박 회장 명의로 돼 있다.
이 집들의 등기부등본엔 100억 원을 웃도는 금액의 근저당권 설정돼 있다. 총 136억 원을 채권최고액으로 하는 근저당권의 공동담보로 설정돼 있는 것이다. 채무자는 두영엠아이와 브렌트유화산업이란 회사. 철강재 판매 회사인 두영엠아이의 대표이사는 고 박용오 회장으로 돼 있으며 박경원 부회장과 부인 서미경 씨가 각각 이사로 등재돼 있다. 브렌트유화산업은 박 부회장의 오랜 측근으로 알려진 김 아무개 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곳이다.
재벌가 인사들이 사업자금 조달을 위해 자택을 담보로 대출받는 건 그다지 생소한 일은 아니다. ‘왕회장’으로 불렸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자택 등기부에도 근저당권 설정 흔적이 남아 있다. 과연 부동산 담보로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는 박경원 부회장 측이 등기부에 적시된 근저당 내역들과 상관없이 선친 명의의 지분을 그대로 승계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지켜나갈지 주목된다.
고 박 회장 명의 성북동 S 빌라 ○동 ××2호에도 가압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난 2008년 10월 수원지방법원의 결정에 따라 가압류 조치된 것으로 나오는데 채권자는 H 캐피탈, 청구금액은 2억 775만 6347원이다. 2억 원 때문에 자택을 가압류당했던 것으로 보아 말 못할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을 거란 추측도 가능해진다. 이 가압류는 1년여 만인 지난 9월 해제됐다. 결국 아들에게 자택 가압류의 짐만큼은 넘겨주지 않은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