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막이’ 걷어내고 ‘오너시대’ 문 활짝
▲ 지난 5월 정용진 당시 신세계 부회장이 세계 PL박람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 중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신세계 백화점의 미래에 대해 밝히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정용진 부회장은 지난 1968년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과 이명희 신세계 회장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정 부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외손자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조카가 된다. 사촌지간인 이 전 회장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는 경복고-서울대 동갑내기 동기동창으로 사이가 각별하다고 한다.
경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서양사학과 1학년을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정 부회장은 지난 1995년 신세계 전략기획실 전략팀 이사대우로 입사하면서 가업에 첫발을 들였다. 1998년 신세계 경영지원실 상무로 승진한 정 부회장은 2000년 부사장을 거쳐 2006년 12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다른 재벌가 후계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속승진을 거듭해왔지만 정작 정 부회장의 첫 유명세를 장식한 것은 경영행보가 아닌 사생활이었다. 지난 1995년 미스코리아 출신 연기자 고현정 씨와 화제 속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8년 만에 파경을 맞은 것이 지금도 재계와 연예계 호사가들 사이에 단골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정 부회장의 경영자 행보에 비해 사생활이 더욱 화제가 됐던 것은 그의 경영참여가 삼성 이재용 전무나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만큼 괄목할 만하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이명희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중요시해온 탓이 크다. 지난 2007년 이 회장이 사보에 기고한 ‘아버지와 나’라는 글 속에서 그의 전문경영인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이병철 창업주)는 나를 불러 몇 가지 지침을 주셨다. 그 첫 번째가 ‘서류에 사인하려고 하지 말라’였다. 책임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맡겼으면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뜻이었다…. 신세계 결재라인에 ‘회장’(오너) 사인난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동안 신세계 경영은 이명희 회장이 사업의 큰 틀을 잡으면 전문경영진이 경영방침을 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방식으로 꾸려져 왔다. 이명희 회장이 결재를 하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 임원인사 때뿐이다.
신세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용진 부회장은 그간 주로 전문경영진에게 제안을 하는 형태로 경영에 참여해왔다고 한다. 물론 정 부회장의 제안 중 상당부분이 실제 경영에 반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통 라이벌 롯데의 황태자 신동빈 부회장이 그룹 경영을 이끄는 것이나 사촌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경영 최일선을 누비는 것에 비하면 소극적 형태의 경영 참여를 해온 셈이다.
이명희 회장은 그동안 정 부회장에게 “전문경영인이 알아서 잘하는 동안 그룹의 미래를 대비해 공부하라”는 당부를 해왔다고 한다. 해외 트렌드 시찰 명목으로 1년에 절반가량을 해외에서 보내온 이 회장은 정 부회장을 해외에 자주 데리고 다니며 경험을 키워주고 시야를 넓혀주는 데 주력했다. 유통 라이벌 롯데의 신동빈 부회장이 일찍부터 일본 유통업계에서 선진 지식을 습득해온 것에 자극 받은 이 회장은 정 부회장이 일부러 일본 출장을 자주 가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소싯적부터 정 부회장에게 일본 현지 유통 인맥을 만들어준 교육 덕분인지 정 부회장은 지금도 틈만 나면 새 아이템을 구하러 해외 출장을 다녀오곤 한다.
이명희 회장은 아들에게 꽤나 ‘엄한’ 어머니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2003년 정 부회장이 고현정 씨와의 이혼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나태해졌다고 판단되자 이 회장은 한남동 자택에서 당시 개점을 앞두고 있던 이마트 양재점까지 뛰어서 출근하도록 시킨 적이 있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몇 개월간 극기 체험을 통해 정 부회장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업무에 충실해졌다는 일화는 재계에서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 1995년 고현정 씨와의 결혼식 모습. | ||
삼성전자 부품부문 사장과 부회장까지 지낸 그는 이건희 전 회장이 2대 총수직에 오르던 1987년 삼성전자에서 삼성물산 부회장직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후 삼성종합화학 부회장을 거쳤다. 그는 1992년부터 4년간 조선호텔 회장을 지낸 후 1996년 신세계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비록 경영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정 명예회장의 아들에 대한 훈육 열정만큼은 이명희 회장 못지않다고 한다. 마치 암행을 하듯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 매장을 둘러보다가 문제점이 발견되면 그 즉시 정 부회장을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신세계 안팎에선 정기적으로 직원들에 대한 강의나 교육에 참여하면서 아들을 살피는 정 명예회장의 정성이 정 부회장을 성장시키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편 이명희 회장은 그간 정 부회장에게 쉽사리 경영권을 넘겨주진 않을 것이라는 긴장감을 심어줘 온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8월 폭락장세 당시 다른 재벌가에선 2세들의 용이한 승계를 위한 지분 매집이 줄을 이었지만 신세계에선 정 부회장 대신 이 회장만이 지분율을 크게 늘렸다. 이에 재계에선 “지분율 증가에 앞서 전문경영진을 상대로 정 부회장이 능력을 입증하길 (이명희 회장이) 원하는 것”이란 분석이 뒤따랐다.
이명희 회장은 지난 1일 인사를 통해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 구학서 회장에 대한 믿음을 그동안 자주 표현해 왔다. 앞서의 기고문을 통해 이 회장은 “인재를 중요시한 아버지가 우수한 전문경영진을 육성해 놓았고 나는 그 인재를 선임한 것 외에 별로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히며 구 회장을 비롯한 전문경영진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기도 했다. 구 회장 역시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재계에서 나만큼 오너로부터 많은 권한을 위임받은 전문경영인도 없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인사를 통해 구학서 회장이 승진하는 대신 신세계 대표이사직을 정용진 부회장에게 넘겨주면서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발을 빼게 됐다. 구학서 체제를 뒷받침해온 백화점부문 석강 대표와 이마트부문 이경상 대표 역시 이번 인사를 통해 고문으로 물러났다. 이 회장 시대를 풍미해온 베테랑 전문경영인들을 뒤로 물리고 신진세력을 대거 승진시켜 정 부회장이 주도적 경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셈이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향후 신세계는 지금껏 해온 전문경영인 중심에서 오너 중심 체제로 바뀌어갈 것”이라 관측하기도 한다. 그동안 이 회장을 수행하며 경영수업을 쌓아온 정 부회장의 여동생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37)가 이번에 신세계 부사장으로 전격 승진한 점 역시 정용진 직할체제 강화 차원으로 평가받는다.
정 부회장의 사내 입지가 한층 강화되면서 향후 지분 승계 과정에도 적지 않은 시선이 쏠릴 태세다. 지난 2006년 기자간담회에서 구학서 당시 사장이 약 1조 원대 상속세 납부를 골자로 한 오너일가 지분 증여계획을 발표해 화제를 불러 모은 바 있다. 그 해 정 부회장은 정재은 명예회장이 보유한 신세계 지분 7.82% 중 4.72%를 상속받아 지분율을 4.86%에서 7.32%로 크게 늘렸으며 이에 대한 증여세로 35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현물 납부하기도 했다. 이는 사상최대 규모의 증여세였다.
정 부회장의 입지 강화와 더불어 그가 최대주주로 있는 광주신세계 역시 재차 주목을 받고 있다.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비롯한 신세계의 소액 주주들은 지난해 4월 정 부회장을 비롯한 전·현직 임원들을 상대로 ‘189억 5000만 원을 신세계에 배상하라’는 내용의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998년 신세계가 자회사였던 광주신세계 유상증자 과정에서 신주를 전량 실권하고 이를 정 부회장이 모두 인수하면서 신세계가 대주주 지위를 상실해 입게 된 손해의 배상을 당시 의사결정에 참여한 임원들을 상대로 청구하는 소송이다.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이 재판은 ‘신세계판 에버랜드 사건’이라 일컬어질 만큼 정 부회장 승계과정에 작지 않은 변수가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 부회장이 경영 최선봉에 나선 이상 그의 지분율 증가와 세금 납부 과정에 대한 재계의 관심은 점점 뜨거워질 듯하다.
정용진 부회장은 언젠가 사석에서 “전문경영인은 현재가 중요하겠지만 나는 10년 후, 20년 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14년 수업 끝에 오너로서의 책임감과 자신감을 경영 최일선에서 보여줘야 할 위치에 서게 된 정용진 부회장. 그가 유통명가 신세계의 앞날을 어떤 빛깔로 물들일지 세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정용진 취미 따라잡기
'절대미각' 덕에 식품사업 쑥쑥
▲ 지난달 26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세계 PL박람회에 참석한 모습. | ||
정 부회장은 샴페인에도 조예가 깊다. 정 부회장이 즐기는 샴페인은 프랑스 루이 로드레사가 만드는 ‘크리스털’로 알려져 있다. 이 샴페인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소수 상류층이 즐기는 종류며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미국 연예계 톱스타들이 즐겨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 부회장의 남다른 미각은 그룹 내에서도 이미 정평이 나 있다. 2003년 초 이마트 김포공항점 개점행사 때 참석했다가 사업장 내 중식당에서 사천식 요리를 맛보고는 “이건 사천식 요리가 아니다”라고 주방장에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면박을 준 일화가 전해진다. 회의석상에서 정 부회장은 늘 캐나다산 빙하수인 ‘휘슬러(Whistler) 워터’만 마신다고 한다. 다른 브랜드 물을 올려놓는 일은 거의 없다고.
까다로운 미각의 소유자인 까닭에서인지 어머니 이명희 회장이 패션 쪽에 관심이 많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 부회장은 식품사업에 더 큰 관심을 가져왔다. 매달 본사에서 열리는 요리 컨벤션에 참석해 일일이 맛을 볼 정도로 열의가 높다.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가 즉석식품코너를 기획해 높은 실적을 거둔 배경에 정 부회장의 공이 컸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재계에선 정용진 부회장에 대해 “취미를 사업화하는 재주를 지녔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식품업 외에 정 부회장 취미가 사업 아이템화한 사례로 자동차 부품 코너를 들 수 있다. 정 부회장은 소문난 자동차광이다. 그가 좋아서 사다 모은 고급 자동차만 10대가 넘는다고 한다. 자동차에 대한 정 부회장의 지대한 관심은 이마트 내 자동차용품 전문매장 특화로 연결이 됐다. 이는 여성 중심 상권인 대형마트에 남성 고객을 대거 유치했다는 평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밖에 정 부회장은 오토바이를 취미로 즐겼다. 지금은 뜸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BMW 모터사이클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독일에 원정 라이딩까지 다녀올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