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때 찍힌 남자, 과거 리플레이
▲ 주먹 ‘꽉’ 지난 1월 22일 이용훈 대법원장이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서초동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이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애초 법원과 검찰 간의 갈등으로 불거진 이번 사태는 급기야 이 원장의 행보까지 위협하는 등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에서는 근래 도마에 오른 재판부의 판결들은 이 원장을 비롯한 일부 법관의 성향 때문으로 보고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이 원장의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08개의 보수단체로 구성된 ‘사법부사태해결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역시 1월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 원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상태다. 여권과 보수단체의 거센 반발에 대해 이 원장은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법원-검찰 간 갈등이 사법부 책임론으로 비화되면서 사퇴 압박에 직면해 있는 이 원장의 파란만장한 법조 인생 역정을 되짚어봤다.
사법부 수장인 이용훈 대법원장은 현재 법원과 검찰 간의 해묵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작금의 법-검 갈등은 수년간 누적돼 온 법원에 대한 검찰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이 원장 취임 후 5년간 무죄선고 비율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원장이 취임한 지난 2005년 이후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연 평균 무죄 선고율은 0.27%로, 이전 5년의 2배에 달한다. 검찰의 유죄입증이 어려워진 것은 검찰의 수사기록보다 법정 증거와 진술에 무게를 두는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됐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원장은 지난 2006년 “검찰 조서는 밀실에서 작성된 것이다” “검찰 수사 기록을 던져 버려라”라고 발언해 검찰총장이 유감을 표명하는 등 법조계에 일대 파문을 몰고 온 바 있다. 당시 이 원장이 직접 사과하면서 검찰과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이후로도 이 원장은 공판중심주의 원칙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아 양측의 갈등은 여전히 불씨를 남겨두고 있었다.
대검찰청 측은 무죄 선고율이 급증한 것과 관련해 “법정 진술과 수사과정에서 한 진술에 대등한 증거능력을 부여하지 않고 차등을 뒀기 때문”이라며 “검찰 조서를 믿지 못하고 법정에서의 증언에 무게를 두다보니 위증이 많아지는 등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법부에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못 느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법원에 접수된 위증사건은 2004년 1013건에서 2008년 1858건으로 80% 이상 늘어났다. 이에 대해 법원은 “공판중심주의에 따른 무죄율 상승은 당연한 결과”라는 입장을 보이며 각을 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만간 검찰이 용산 참사 수사기록 공개를 결정한 재판부를 바꿔달라며 낸 기피신청에 대한 결론이 나올 예정이어서 양측의 갈등이 재점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번 사태가 단순히 검찰과 법원의 힘겨루기에 그치지 않을 기세라는 점이다. 법원 판결을 놓고 입법부가 사법부 수장에게 “책임을 지라”고 압박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사태는 이념논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강기갑 의원 무죄판결 등을 ‘좌편향 불공정 사법사태’로 규정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1월 20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좌편향, 불공정 사법사태를 초래한 이 원장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데 이어 장광근 한나라당 사무총장도 “오늘의 사법부 현상은 좌파정권이 10년 동안 뿌려놓은 씨앗 탓”이라며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이 원장의 성향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것은 ‘우리법연구회’다.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법원 내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으로, 단체의 폐쇄적인 성격과 소속 회원들의 정치적 편중 성향으로 인해 수차례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이 원장은 대법원장 취임 직전인 2005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법원에 ‘우리법연구회’ 같은 단체가 있어선 안 된다”고 밝혔지만 취임 이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원장은 취임 후 우리법연구회 창립멤버인 박시환 당시 변호사를 대법관으로 제청하는 등 우리법연구회 소속 법조인을 요직에 대거 기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법관 임명을 전후해 우리법연구회 창립멤버인 이광범 부장판사와 김종훈 변호사도 각각 사법정책실장과 대법원장 비서실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특히 이 부장판사는 1월 13일 용산 사건의 미공개 수사기록에 대해 공개 결정을 내린 서울고법 형사7부의 재판장이기도 하다.
전남 보성 출신인 이 원장은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15회)에 합격한 뒤 법조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서부지원장, 법원행정처 차장,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굵직한 자리들을 두루 거쳤다.
▲ 2005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대법원장 임명장을 수여받는 이용훈 대법원장(왼쪽). | ||
이 원장이 날개를 펴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다. 1993년 서울 서부지원장에서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발탁된 그는 불과 9개월 만에 대법관의 자리를 꿰찼다. 또 1998년 중앙선관위원장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 원장은 소신을 지킨 의미 있는 판결로 한때 주목을 받았다. 판사재직 시절 그는 많은 다수 의견에 맞서 소수의견을 내는 등 소신을 지켰다. 1996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사건과 관련, 이 원장은 당시 ‘공소시효가 완료됐다’는 다수 의견에 맞서 “국가로서는 삼청교육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국민들에 대해 정정당당하게 그러한 불법행위 자체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구차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주장을 내세워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내 화제가 됐다.
1990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재직 시절에는 ‘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1심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명예훼손 혐의를 추가로 인정해 위자료 액수를 높이기도 했다. 그는 또 1995년 ‘무노동 부분임금’이 ‘무노동 무임금’으로 판례가 바뀔 때에도 “파업기간 동안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현실적 근로와 직접적 대응관계에 있지 아니한 임금은 이를 공제하지 않고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12·12 및 5·18사건 판결에서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공격을 폭동으로 규정한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내는 등 원칙과 소신에 근거한 판결로 주목받았다.
이 외에도 이 원장은 ‘공무원이 민원을 적법하게 처리한 뒤 사례금을 받았더라도 해임할 수 있다’고 판결, 뇌물수수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또 환자가 치료도중 숨졌을 경우 사망원인을 입증할 책임이 의사에게 있다는 새로운 판례를 남기기도 했다. 노조 전임자에게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친 노동자적 판결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는 ‘이적단체 구성원 사이의 내부토론도 처벌할 수 있다’며 보다 넓은 국가보안법 해석을 보인 바 있고, 황혼 이혼 소송에서는 이혼사유를 엄격히 제한해 이혼을 불허하는 등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 원장은 술을 입에 대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론과 실무 능력을 두루 겸비한 법조계의 실력자로 평가되는데 평소 성실과 정도를 원칙으로 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재판기록을 검토하거나 판결문 작성 등 업무에 있어서 그는 병적일 정도로 깐깐하고 빈틈없기로 유명하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 원장을 지칭해 ‘벙커’로 비유하기도 한다. 후배 판사들을 지도할 때 워낙 꼼꼼하고 엄격해서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지어진 별명이라고 한다.
열정과 소신은 이 원장을 대변하는 단어다. 서울서부지원장 시절이던 1993년 사법파동 때는 개혁의 소신을 후배들과 공유해 소장 판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고, 같은해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재직할 때는 사법개혁 초안을 성안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1994년 7월 대법관에 임명된 이 원장이 매번 ‘블랙박스’라고 불리는 큰 가방에 두꺼운 소송기록을 싸들고 다녔던 일화는 지금도 법조계 주변에서 회자되고 있다. 또 1998년 2월부터 2년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깨끗한 선거문화 정착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이 원장은 ‘공인’의 사회적 책임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이 원장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던 2000년 후보자들의 병역·납세 실적이 인터넷에 전면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자 “선거법의 정신은 후보자의 모든 이력을 유권자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공인은 사생활이라도 국민에게 공개해 국민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원장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그가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코드인사’ 논란이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대리인을 맡았으며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노무현 정권과 친밀했다는 이유로 ‘코드인사’ 논쟁에 휘말렸다. 당시 그는 “법률가로서 전대미문의 사건인 대통령 탄핵사건에 관심이 있었던 차에 의뢰가 들어와 법정대리인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정치적인 해석을 경계했지만 코드인사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재산내역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재산변동 상황과 납세 자료에 따르면 이 원장 본인과 부인, 자녀의 재산은 35억 7000만 원으로 대법관 퇴임 당시 신고된 재산(11억 3500만 원)보다 24억 3500만 원이 증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가 변호사 활동에 따른 수입 등에 대해 부가가치세와 종합소득세 등으로 납부한 세금만도 총 21억 7000만 원에 달했다. 그는 대법관 퇴임 후 5년간 무려 470여 건의 사건을 수임하는 등 왕성한 변호사 활동을 통해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이 원장은 국회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투표에서 재적의원 277명 중 212명의 찬성표를 얻어 사법부 수장으로 공식 취임했다. 당초 논란에도 불구하고 다수표를 얻은 것은 ‘성실한 원칙주의자’로서 정치색에 휘둘릴 가능성이 적다는 인식을 안겨줬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법조 인생을 걸어온 이 원장은 20여 개월의 임기를 남겨놓고 거센 풍랑의 한가운데 서 있다. 여권과 보수단체의 역풍에 당면한 이 원장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정치권과 법조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소신 행보' 눈에 띄네
'사법부 과오' 국민에 사과
▲ 대법원장의 탄핵을 요구하는 애국단체총연합회의 시위 모습. | ||
이 원장은 사법부의 지난 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2008년 이 원장은 사법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비롯해 민족일보 사건, 민청학련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사건 등과 관련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는 사법부 수장으로서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관이 올곧은 자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그 결과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