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향후 진로에 국민들 ‘채널고정’
▲ 지난 8일 MBC 본부장 선임과 관련해 방송문화진흥회 회의장에 들어서는 엄기영 사장. 이날 엄 사장은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 ||
2월 8일 전격 사퇴를 선언한 엄기영 전 MBC 사장이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밝힌 소회다. 2008년 3월 제28대 MBC 사장으로 취임한 엄 전 사장은 임기를 1년여 남겨둔 시점에서 결국 직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는 처지가 됐다.
엄 전 사장이 사퇴 카드를 꺼내든 배경에는 감사원 감사를 비롯해 이사회 이사진들의 교체와 맞물린 갖가지 압박이 작용했을 것이란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선장을 잃어버린 MBC는 졸지에 거센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 본부는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선임한 신임 본부장들을 ‘낙하산 이사’로 규정하고 출근저지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추후 총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엄 전 사장 사퇴는 정치권에도 거센 후폭풍을 몰아오고 있다. 민주당은 엄 전 사장 사퇴 배경에는 현 정권이 6·2지방선거를 앞두고 방송을 장악하려는 속셈 하에서 벌인 일종의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민주당이 MBC 사장 퇴진 문제를 왜곡해 여론을 선동하는 것은 사안을 정치적으로 비틀어 지방선거에서 득을 보려는 계산”이라며 방송개혁문제를 정쟁의 빌미로 삼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MBC 사태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한 엄 전 사장이 걸어온 36년 방송 인생을 되짚어 봤다.
엄 전 사장은 사내게시판에 ‘사원 여러분들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는 고별사 성격을 띤 글을 통해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책임 경영의 원칙은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며 사퇴 배경에 대해 조심스레 언급했다.
엄 전 사장의 사퇴는 MBC 이사 선임에 대해 방문진 이사회가 자신의 인사안과 다른 방향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반발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방문진은 MBC 이사진 후보로 황희만 울산MBC 사장, 윤혁 MBC 부국장, 안광한 MBC 편성국장을 추천한 바 있다. 하지만 엄 전 사장은 보도 본부장에 권재홍 보도국 선임기자, TV제작 본부장에 안우정 예능국장, 편성 본부장에 안광한 편성국장을 이사진으로 추천했었다.
엄 전 사장은 2월 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방문진 이사회가 끝난 뒤 “오늘 방문진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MBC 사장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방문진의 이번 이사 선임을 자신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으로 판단해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춘천 출신인 엄 전 사장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재학시절 문리대 학내잡지인 <형성>의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3선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엄 전 사장은 이로 인해 수배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엄 전 사장이 MBC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 1974년이다. 사회부와 경제부, 보도특집부 등에서 취재기자로 활약한 그는 프랑스 특파원, 보도국장, 보도본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간판 뉴스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 앵커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뉴스데스크’를 진행했던 그는 2002년 1월 당시 ‘뉴스데스크’가 타 방송 9시 뉴스 시청률 경쟁에서 밀리자 MBC 뉴스의 구원투수로 나서며 다시 앵커석에 앉았다.
보도본부장의 직위를 달고 다시 앵커를 맡을 당시 그는 “심층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생활밀착형 뉴스를 전달하겠습니다. 시청자들이 뉴스가 사회를 통합해주는 따뜻한 매체이길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엄 전 사장의 ‘컴백’에 상당수의 시청자들이 다시 채널을 MBC로 돌렸다.
▲ MBC 뉴스데스크의 간판 앵커였던 엄기영 전 사장(왼쪽). | ||
“세상에 이런 나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저는 쓰린 마음을 안고 뉴스를 진행하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탈을 쓴 악마라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정말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는 그의 멘트에 시청자들은 웃고 울고 분노했다. 황당하고 기막힌 사건사고 소식을 전달하면서 그가 내뱉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멘트는 개그맨들이 패러디할 만큼 인기를 얻기도 했다. 또 “낙엽 지는 가을 거리를 걷고 싶지 않으십니까”와 같은 낭만적이고 사람냄새 나는 멘트와 재치 있는 애드리브로 시청자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5년 2개월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앵커석에 앉았을 때도 특유의 공감화법은 여전했다. 2005년 12월 15일 MBC ‘9시 뉴스데스크’ 오프닝 코멘트에서 그는 흥분되고 떨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요.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없다고 합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파리 특파원 시절에도 엄 전 사장은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암울하던 국내 정치상황과는 상반되는 이국적이고 낭만이 가득한 파리의 소식을 전달하는 곳에는 항상 ‘파리 특파원 엄기영’이 있었다. 센 강변과 몽마르트르, 에펠탑을 배경으로 베이지색 바바리 코트 깃을 세워 입은 채 뉴스를 전달하던 그의 모습은 부드러운 그의 이미지와 맞물려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외국여행이 활성화되지 않던 그 시절, 국민들은 그가 전하는 파리의 소식을 들으며 낭만에 젖기도 했으며 자유로운 파리지엥들이 오가는 예술의 도시를 무작정 동경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MBC뉴스 엄기영입니다”라는 그의 클로징 멘트는 보도내용과는 무관하게 그를 낭만적인 인물로 각인시키기도 했다.
브라운관을 통해 보이는 것처럼 실제로도 엄 전 사장은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특유의 친화력으로 구성원들 사이에서 덕망이 높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자랑하고 있다. 엄 전 사장이 식당에서 항상 문을 등지고 앉아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MBC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일이 인사하다 보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계서열이 엄격한 기자세계에서도 그는 권위적인 면모 대신 후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소줏잔을 기울일 줄 아는 소탈한 성격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오랫동안 인기앵커로서 승승장구했던 그였지만 그는 결코 오만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특히 2007년 10월 아들을 장가 보낼 당시 신랑 신부의 동시입장을 제안한 것은 그의 민주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 딸을 건네는 것은 굉장히 봉건적인 문화예요. 보기에 안 좋아 사돈께 부탁을 드렸죠. 제 딸 시집 보낼 때도 신랑 손 붙잡고 들어가라고 했거든요. 예물과 예단, 폐백도 다 하지 않았어요. 다행히 사돈댁에서 잘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아이들끼리 반지와 시계만 간단히 했어요.”
무엇보다 따스한 인간미는 엄 전 사장이 지닌 가장 큰 매력으로 통했다. 앵커시절에도 엄 전 사장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각을 곧잘 드러냈다. 기분 좋은 뉴스를 전하면서 잔잔하게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뉴스를 진행하면서 종종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가 매고 나왔던 넥타이는 시청자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더불어 그의 따뜻한 성품과 위트를 동시에 확인해주는 좋은 사례로 꼽히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엄 전 사장은 어린이날마다 항상 다른 피부색을 가진 어린이들이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긴 넥타이를 매고 등장, 시청자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유쾌한 넥타이’가 화제에 오르자 당시 엄 전 사장은 쑥쓰러워하며 “아주 기분 좋은 넥타이죠. 우리뿐만 아니라 백인, 흑인 등 다른 피부색의 많은 아이들이 지구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축복해야 할 날에는 항상 이 넥타이를 맵니다.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이날 뉴스를 마치며 엄 전 사장이 준비한 클로징멘트는 “어린이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 했죠. 우리 어린이들의 환한 표정, 오늘처럼 계속 됐으면 좋겠습니다”와 같은 축복과 사랑의 인사였다.
▲ 엄기영 전 사장의 사퇴는 정치적 이슈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사진은 방송장악 음모와 관련해 정권을 비판하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 이종현 기자 | ||
엄 전 사장이 기자 시절 당한 사고로 인해 생사의 기로에 처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7년 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로 활동할 당시 설악산에서 열린 시산제 취재를 위해 6인승 경비행기를 타고가다 추락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당시 이 사고는 조종사가 즉사하고 부조종사도 병원 후송 뒤 사망한 대형사고였다. 당시 큰 부상을 입은 엄 전 사장은 두 달 동안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가 뇌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이후 엄 전 사장은 주위 사람들에게 당시의 아찔한 경험을 얘기하면서 “덤 인생을 살고 있다. 받은 사랑만큼 국민과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엄 전 사장은 MBC 간판 앵커에서 사장으로 변신하면서 방송가 화제의 인물로 부각되기도 했다. 당시 엄 전 사장은 간판 앵커로서의 브랜드 가치, 대외적 신뢰도, 온화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성품, 원칙을 지키면서도 소통이 원활한 성격 등이 고려돼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2008년 3월 취임한 뒤로는 내내 가시밭길을 걸었다.
엄 전 사장은 지난해 8월 현 방문진 출범 이후 끊임없는 교체 압박에 시달렸으며 방문진 이사들로부터 <피디수첩> 논란과 노조 단체협약 개정 등을 이유로 사퇴를 종용받아왔다. 그는 사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을 통해 “돌이켜보면 제가 사장으로 재임한 2년은 MBC 역사상 그런 2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했습니다. 방통융합과 방송업계를 둘러싼 재편 논의가 대세였던 취임 초기, 저의 목표는 공영성을 강화해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방송산업을 둘러싼 변화의 물결에 기민하게 대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저의 예상을 훨씬 넘을 만큼 더 복잡했습니다”고 회한을 밝히기도 했다.
재임기간 동안 엄 전 사장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격변기에 사장을 맡아 정권과 노골적으로 각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방송자유라는 대의명분을 어느 정도 지켜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결과적으로 회사경영과 방송독립 중 어느 하나도 얻어낸 게 없다는 부정적 견해도 없지 않다.
오랫동안 국민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엄 전 사장은 정치권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인지도나 신뢰도면에서 엄기영만 한 카드가 없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면서 그에 대한 영입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치권의 줄기찬 구애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엄 전 사장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뉴스를 진행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 다. 그는 또 출마설이 나돌 때마다 “방송을 통해 국민들이 보내준 지지를 사사로이 이용할 수 없다”며 불출마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권은 엄 전 사장이 사퇴 카드를 꺼내든 만큼 그의 향후 행보가 지금까지와는 다를 수도 있다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핵심은 역시 엄 전 사장이 정치권에 입문해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할지 여부다. 스타앵커 출신인 엄 전 사장은 그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으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아왔으며 춘천 출신이라는 점에서 유력한 강원도지사 후보로 거론돼 왔다.
엄 전 사장의 출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엄 전 사장이 정치권 입문을 고려하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그동안 숱한 정치권의 구애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태도를 볼 때 정치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자신의 사퇴 선언을 기폭제로 MBC 전체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위기상황에서 엄 전 사장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