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목소리를 낼지 사분오열할지가 첫 번째 ‘분수령’
문재인 전 대표와 안철수 전 대표.
정부여당의 잇따른 국면전환 카드 이후 야권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야권 두 축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는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놓고 정면충돌하더니, 정부의 2단계 국면전환 카드에는 사실상 ‘전략적 공조’를 꾀했다. 정부의 국면전환 카드에 따라 냉·온탕을 오고 간 셈이다. ‘김병준 카드’와 함께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와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등은 ‘되치기’를 당했다.
새누리당이 그간 야권의 요구 사항이었던 ‘거국중립내각’을 제안하고 청와대가 톤다운된 ‘책임총리 카드’를 던지면서 결과적으로 야권 내부 갈라치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4·13 총선 당시 ‘김종인 끌어안기’에 나선 문 전 대표의 여권 갈라치기와 비견될 만한 일로 평가받는다. 여권이 개헌파 연정인 ‘역단일화 시나리오’를 고리로 야권 권력구도를 뒤흔들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김병준 신임 국무총리 내정자도 11월 3일 수락 기자간담회에서 ‘여야 협치’를 강조, 박근혜 정부가 또다시 ‘개헌 불씨 살리기’로 여권 발 정계개편에 착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청와대의 큰 그림에 당한 게 아니냐.” 민주당 한 관계자는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에 빠진 박근혜 정부의 ‘김병준 카드’가 현실화되자 이같이 말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사실상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작품이라는 얘기도 끊이지 않는다. 애초 이 구도의 변수는 박근혜 정부의 거국중립내각 수용 여부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쓰나미’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직후 야권은 ‘거국중립내각’을 앞세워 파상공세를 폈다. 문 전 대표는 10월 26일 ‘‘표류하는 국정을 수습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긴급성명을 통해 “박 대통령은 당적을 버리고 국회와 협의해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시라”고 훈수를 뒀다. 박 대통령의 탈당 및 2선 후퇴, 책임총리 실시, 내각 구성의 국회 우선권 등을 요구한 것이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도, 대권주자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부겸 의원, 전략가인 민병두 의원 등이 일제히 문 전 대표 주장에 힘을 실었다. 여권 내 비박(비박근혜)계인 김무성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도 나섰다. 정계 복귀한 손 전 대표도 거국중립내각 및 여야 간 대연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력이 문제였다. 캐스팅보트를 쥔 안 전 대표는 “거국내각은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굉장히 어렵다”며 사실상 제동을 걸었다. 박 대통령 탈당과 2선 후퇴를 골자로 한 민주당 안과는 달리, 외교를 포함한 권한 위임을 받은 여야 합의 총리 임명에 방점을 찍었다.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통한 지지층 확보 전략 차원으로 분석됐다.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 문 전 대표와 안 전 대표가 충돌하자 여권의 대대적인 역습이 시작됐다. 새누리당이 10월 31일 거국중립내각 수용을 시사하며 책임총리에 김병준 교수를 우선 추천한 데 이어 손학규·김종인 전 대표도 후보군에 올렸다. 야권 성향의 개헌파를 총리 후보군에 올리면서 ‘여권 발 역단일화’ 시나리오가 부상했다. 일각에선 여권 실세인 친박(친박근혜)계가 원하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추진할 수 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됐다.
새누리당 1단계 국면전환 안은 애초부터 대통령 탈당을 전제하지 않은 거국내각 구성이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20%대 지지율마저 붕괴된 박 대통령의 ‘탈당 저지선’을 공고히 하는 한편, 탈핵과 하야에 선 그은 야권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인 거국중립내각 카드를 전격 수용, 야권의 허를 찔렀다.
실제 문 전 대표는 이후 내각 구성권과 정부 운영권의 완전한 국회 이양 등을 주장하며 기존 입장을 틀었다. 이에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문 전 대표를 향해 “대통령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대통령 하야하라’는 말을 어쩌면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냐”라며 힐난했다. 새누리당의 역습이 야권 내부 혼선으로 나타난 셈이다.
야권이 요구한 거국중립내각은 ‘공동책임론’을 전제로 한다.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한 문 전 대표가 ‘지지율 10%’ 선에도 빨간불이 켜진 박근혜 정부에 올라탈 이유는 애초부터 현실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야권의 거국중립내각 요구는 ‘반 박근혜 프레임’에 따른 반사이익을 포기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친문(친문재인)계의 전략적 판단 미스가 야권 혼선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당 지도부 한 관계자는 야권의 거국내각구성 카드에 대해 “최후의 수단인 거국중립내각을 앞세워 내각 총사퇴 등 현실적인 조건을 이뤄내기만 해도 본전”이라고 말했다. 결정적인 미스였다. 민주당이 당론을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민의당은 ‘문재인 때리기’, 정의당은 ‘대통령 하야’를 주장, 야권의 아킬레스건인 야권 분열만 초래했다.
그 사이 박 대통령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비롯해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내쳤다. 야권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의 선제 대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당론과 당내 대권 주자 메시지를 분리해야 한다”며 문 전 대표를 정면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11월 2일 ‘김병준 카드’를 전격 꺼내 들며 대대적인 국면전환에 나섰다. 박근혜 정부는 ‘김병준 카드’에 이어 다음 날인 11월3일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 출신인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내정했다. DJ와 노무현 지지층 끌어안기를 통한 정국 돌파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야권 내부는 격앙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박 대통령의 독선적인 리더십에 대한 반발이다. 박 대통령과 김 내정자가 독대한 10월 29일부터 청와대가 발표한 11월 2일까지, 야권은 청와대 누구로부터도 관련 얘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 그러자 야권에선 “이제는 하야를 요구할 때”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문재인·안철수 전 대표도 ‘중대결심’, ‘하야’ 등을 단어를 쓰면서 벼랑 끝 전술을 폈다.
그림자 권력 논란도 불거졌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김기춘 발 수습 시나리오가 그 정도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우 전 수석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이 퇴진한 이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최재경 신임 민정수석을 추천하는 등 청와대 조직 장악에 나섰다는 주장을 빗대 비판한 것이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도 “10% 지지율로 국정을 장악할 셈이냐”라고 비판했다. ‘인사청문회 보이콧’을 천명한 야 3당은 국민여론에 따라 장외투쟁을 통한 하야론을 전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내부에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도 감지됐다. 여의도 정가에선 김 내정자가 문 전 대표의 약점을 많이 알고 있는 만큼, 차기 대선 국면에서 확인되지 않은 이른바 ‘문재인 파일’을 공개할 것이란 주장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김 내정자는 친노 인사이지만, 그간 강연정치 등을 통해 계파 패권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정치권 관계자는 “김 내정자가 주변 인사들에게 친노 패권주의 등 계파 조직 문화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안 전 대표 상황도 좋지 않다. 국민의당 ‘포스트 박지원’으로 유력했던 김 내정자 영입은 안 전 대표가 주도했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당내 호남파인 천정배 의원은 이와 관련해 “안 전 대표가 당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야 되겠다고 고집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정치적 국면마다 ‘인물난’에 시달렸던 안 전 대표의 인재풀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안철수계와 호남파의 내부 헤게모니 쟁탈전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야권 한 관계자는 “(게이트 정국에서) 야 3당과 대선 주자들이 같이 목소리를 낼지, 아니면 사분오열할지가 첫 번째 분수령”이라며 “이후 대통령 퇴진이냐, 거국중립내각이냐를 놓고 공조와 각자도생의 갈림길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