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통장 물어와라” 아이들 공범 삼아
범죄조직들이 10대들의 대포통장을 입수해 범죄에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 정문앞.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최근 인터넷 사기, 불법 인터넷 도박 등 지능범죄조직이 소규모 통장 거래를 비교적 쉽게 이용할 수 있는 10대들을 공범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10대들을 조직의 하부 조직원으로 영입한 뒤 주로 대포통장 모집책과 인출책 등 가벼운 역할을 맡긴다. 이후 경찰에 적발될 경우에는 이처럼 조직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10대들이 희생양이 된다. 하나의 기업처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실제 조직과는 달리 10대들은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기 때문에 ‘꼬리 자르기’가 쉽기 때문이다.
새로 통장을 개설하거나 가지고 있는 계좌를 이용해 대포통장을 만들기 용이한 점도 범죄조직들이 10대들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3월부터 대포통장 근절을 내세우며 신규 계좌 개설에 엄격한 기준을 들이댔지만, 법정대리인과 함께 은행을 방문하는 미성년자의 경우 계좌 개설을 거절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은행업계의 이야기다. 300만 원 이하의 소규모 금융 거래 계좌의 경우에는 대포통장 악용 위험이 적은 것으로 판단하므로 학생들의 용돈 저축용 통장같이 소소한 거래가 오가는 계좌 개설까지 제재할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은행업계 관계자는 “각 금융기관마다 신규 계좌 개설을 엄격히 하라는 지침이 내려지긴 했지만 당장 부모와 함께 방문하거나, 필요한 서류를 모두 갖추고 방문한 미성년자에 대해 개설 불가를 통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대부분 용돈 전용 계좌를 목적으로 하는데 거절할 마땅한 이유도 없다. 다만 아르바이트 월급용 계좌 등 친인척을 제외한 타인이나 타행에서 돈이 입금될 수 있는 경우에는 좀 더 엄격하게 심사한다”고 말했다.
범죄조직 입장에서 10대들이 대포통장을 물어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만큼, 아예 자신들의 고객이었던 10대를 조직원으로 영입하는 지능범죄조직도 있다. 지난 8월 친구들의 통장을 대포통장으로 이용해 피해자들로부터 3000여 만 원 상당의 돈을 받은 뒤 이를 모두 도박 자금으로 탕진한 A 군(18)이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SNS를 통해 스포츠 토토 등 불법 도박 사이트 광고를 접한 뒤 지난해 7월부터 도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썼지만 시간이 갈수록 판돈이 커지자 동급생에게서 돈을 빼앗거나 인터넷 사기 등을 통해 도박 자금을 마련했다. A 군이 고액의 판돈을 베팅하는 것을 눈 여겨 본 도박 사이트 운영진이 접근한 것은 지난 3월이었다. “‘포인트’로 지급하는 베팅 머니를 20% 인상해 지급할 테니 대포통장 모집책으로 활동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 조건이었다.
A 군은 재학 중인 학교와 인근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선후배들로부터 대포통장 20여 개를 마련해 운영자에게 넘겼다. 운영자가 이를 이용해 가로챈 범죄 이익금은 적게는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 상당에 이를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미성년자들의 거래 계좌는 금융 거래의 규모가 제한되기 마련이지만 지능범죄조직들에게 이런 점은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 이상의 대포통장을 매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범행도 주로 인터넷 중고거래 사기 등을 통해 소액 거래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금액을 늘리는 식으로 이뤄진다. 금융당국에서 대포통장을 이용한 지능범죄 근절을 위해 100만 원 이상의 돈을 입금 또는 인출한 뒤 다른 거래는 30분 뒤에 진행될 수 있도록 지연인출제도를 도입했지만 여러 개의 계좌에 입금된 소액을 인출하는 것에 대한 방지책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간편 송금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금융 거래를 하기 때문에 계좌를 관리하는 부모의 눈을 쉽게 피한다. 간편 송금 어플리케이션은 공인인증서나 보안카드가 필요 없고 받는 사람의 계좌와 비밀번호만 알고 있으면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대포통장을 이용해 거래하는 지능범죄조직들은 부모가 공인인증서나 보안카드를 관리하고 있는 미성년자들에게 이런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게 한 뒤 범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지능범죄에 자녀들의 계좌가 이용됐다는 통보를 받은 부모들은 계좌의 입출금 내역을 보고 깜짝 놀라기 일수다.
한 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팀 관계자는 “보이스 피싱 등 지능범죄에 이용된 대포통장의 경우 그 명의인도 피해액의 절반을 물어줘야 하며, 1년간 신규 계좌 개설이 금지됨은 물론이고 모든 금융기관에 정보가 공개되게 된다”라며 “어린 학생들의 경우는 단순하게 계좌만 빌려주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쉽게 통장을 남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아 부모가 자주 계좌를 확인하는 등 엄격한 관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