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박계 흔들기-친박계 버티기 작전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새누리당의 내분이 점입가경이다. 비박계의 당 지도부 퇴진 주장에 친박계는 버티기 작전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양새다. 국회의사당에 나란히 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앞줄 왼쪽)와 정진석 원내대표(앞줄 오른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11월 4일 거의 자정까지 진행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의 일이다. 지도부는 물러나라는 비박계와 수습부터 하자는 친박계 간에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끝장토론 분위기였다. 친박계 최고위원을 향해 한 비박계 의원은 “닥쳐라. 거지같은 XX“라는 말까지 나왔다. 기류가 심상찮았다. 친박계 지도부 총사퇴의 중심에 있는 이정현 대표는 모두 세 차례 신상발언을 했는데 마무리 발언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 적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엊그제 밤에 너무 답답한 마음에 통일전망대 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군부대가 보이는 곳까지 갔는데 초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초병에게 다가가고 암구호를 잘못대면 나를 총으로 쏴 죽여주겠지.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다. 죄는 숨길 수 없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수습할 때까지 좀 기다려주면 안되겠나.”
이 발언으로 의총은 흐지부지 끝났다. 현장에 있었다던 한 당직자는 “이게 바로 보수정당에 몸담은 분들의 특징”이라며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지면서 파장 분위기가 됐고 친박계가 힘을 받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당 내부를 향해 안테나를 한껏 드리우고 있는 친박계는 최소한 ‘분당은 없다’는 분위기를 간파했다고 한다. 친박계 혹은 소수의 강성 친박계를 남겨두고 비박계가 분당을 선언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친박계 한 관계자의 분석은 이랬다.
“비박계도 다들 처음에는 친박계가 아니었느냐.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데 아니다. 보수도 분열되면 망한다는 것을 의원들이 잘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당 대표 시절에, 이인제 의원도 탈당 후 창당해서 다 실패했다. 지금 비박계가 지도부 총사퇴나 친박계 2선 후퇴 정도만 요구하는 것도 분당은 않겠다는 선언 아니냐. 내년까지만 버티면 된다. 두 달도 안 남았다.”
실제로 비박계 초·재선 의원들은 연일 회동하고 있지만 “재창당 수준의 쇄신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현 지도부의 총사퇴가 첫걸음”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김무성 전 대표도 “재창당 수준의 쇄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분당을 언급하는 이는 없다.
앞서의 관계자는 “분당을 하게 될 경우 창당 준비금이 어마어마해진다. 누가 그 돈을 내겠냐”며 “새누리당의 조직력, 대구경북의 응집력을 잃을 수 없고 무엇보다 대선을 앞두고 창당한 정당의 이름도 알 수 없는데 그 큰 선거를 치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대선을 앞두고 신당 창당은 곧 대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친박계 한 핵심 의원은 이런 말을 들려줬다. 친박계 버티기의 기한을 내년 1월 중순까지 잡았다는 것이다. 그때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다. 그는 “검찰 수사 내용이 조금씩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 특검은 피할 수 있다. 우병우의 검찰 조사 사진이 등장해 놀랐는데 여야 어디도 특검 하자는 말은 않더라”라며 “반 총장의 귀국과 향후 그의 행보에 초점이 맞춰지면 아무래도 그와 교류해 온 우리 친박계를 저들도 어쩌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친박계는 현 지도부가 물러날 경우엔 마치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관련 의혹을 친박계가 모두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점에서 절대 불가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김 전 대표가 “최순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발언하면서 마치 현재 친박계가 최 씨 존재를 알고도 무시해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래서 지금 비박계는 최순실 게이트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청관계를 수직적으로 가져갔다는 책임을 묻고 있는데 물러나게 된다면 비박계가 씌운 모든 혐의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친박계 3선 의원은 “당장 비박계가 당을 뛰쳐나갈 수가 없는 것은 비박계 구심점이 약하고 차기 유력 주자도 없기 때문”이라며 “그런 존재가 없는데 비박계가 얼씨구나 하고 탈당할 수 있겠는가. 전혀 아니올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친박계는 이 모든 문제를 5년 대통령 중심제의 폐단으로 프레임해 개헌 동력으로 삼는 모습이다.
11월 10일 국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신행정부에서의 한미 외교·경제 관계 전망’을 주제로 세미나를 연 윤상현 의원이 대표적이다. 윤 의원은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질문에 답을 비켜가며 “최순실 사태는 오히려 개헌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을 더욱 더 증명해 보인 것 아니냐”며 “그래서 개헌으로 가야 한다. 국회가 빨리 나서서 개헌 관련 특위도 만들고 여야가 개헌에 대해 의견을 모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윤 의원은 이날 김 전 대표의 ‘박 대통령 탈당 주장과 관련해선 “누구에게든 정당 가입과 탈퇴를 강요할 순 없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힘을 보탰다. 일각에서는 친박계가 보좌진을 중심으로 한 ‘개헌팀’을 꾸렸다고도 전해진다.
한편으로 이 대표는 비박계가 말하는 재창당을 위해 ‘재창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킬 예정이라고 언론에 흘렸다. 하지만 비박계는 사퇴해야 할 지도부가 재창당 준비위를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이는 원유철 전 원내대표가 기획한 것으로 당내 최다선 의원들이 다선의 중지를 모으자는 취지로 이 대표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8선의 서청원, 6선의 김무성, 5선의 원유철 정갑윤 이주영 심재철 정병국, 4선의 유승민 최경환 의원의 ‘9인협의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교묘한 수가 담겨 있다는 지적도 있다. 홀수로 구성되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다수결로 할 수 있지만 친박계가 수적 우위에 있다. 서청원 정갑윤 최경환 의원은 대표적인 친박계이고, 이주영 의원은 여러 당내 경선에서 친박계의 지원을 받았고 이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까지 지냈다. 원 의원도 친박계다. 그러니 친박계가 5명, 비박계가 4명이 된다.
원 의원은 이 대표를 비롯해 친박계 의원들에게는 직접 이런 제안을 했고, 비박계에는 정병국 의원에게만 제안한 뒤 김 전 대표와 유·심 의원에게 의논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 전 대표와 유 의원이 “재창당준비위원회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박계가 김무성 전 대표나 유승민 전 원내대표, 정진석 현 원내대표 중에 비상대책위원장을 선임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친박계는 다시 분주하다. 현 지도부가 버티기를 고집할 경우엔 비박계가 사실상 당 최고의사결정기구를 무시하는 쪽으로 강행하고 한 지붕 두 지도부 체제로 비대위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친박계 의원을 비대위에 인선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비대위가 꾸려지면 친박은 폐족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부는 탈박 가능성도 점친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를 빼고 일부 의원들은 요즘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친박이라는 수식어는 좀 빼 달라”고 주문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