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판도 흔들고 개헌 불씨 살리고…
여야 비주류 중진 의원들이 교황 선출 방식인 콘클라베 방식으로 총리 선출을 추진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국회 본회의장.
11월 21일 김재경·이종구 새누리당 의원, 박영선·변재일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주현 국민의당 의원 등은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났다. 이들은 정 의장에게 약 160명의 서명이 담긴 본회의 전원위원회 소집요구서를 전달했다. 국회법상 재적 의원 4분의 1(75명)이상이 요구하면 의장은 본회의나 전원위원회를 열 수 있다.
이들은 본회의나 전원위원회에서 20대 국회의원 전원이 ‘콘클라베(교황 선출 추기경단 회의)’로 차기 총리 선출에 대한 결론을 내자는 입장이다. 박영선 의원은 “최순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나고 있지만 국회가 중심이 되고 있지 않다. 자괴감을 느낀다. 국회가 나서서 해법을 마련해보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콘클라베는 ‘열쇠로 잠그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가톨릭 교회가 교황 임종시 소집하는 교황 선출 비밀회의다. 120명 이내의 추기경단은 3분의 2가 찬성할 때까지 계속 투표를 진행해 교황을 결정한다. ‘총리 콘클라베’는 이 같은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본회의에서 의원들이 각자 염두에 둔 총리 후보를 적은 뒤 후보가 나올 때까지 투표를 하는 방법이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은 “우리가 대통령을 탄핵하든 대통령이 하야를 하든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대행 역할을 맡을 것이다. 국정농단 사건에 책임이 있는 황 총리를 그대로 놔두면 안 된다. 야권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총리후보군을 두고 야 3당의 생각이 다르다. 새누리당과도 합의가 어렵다.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총리 콘클라베가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야 당내 비주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총리 임명을 위해 콘클라베를 제안한 것”이라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콘클라베 방식은 소수파들이 본인들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콘클라베는 수적 우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주류파들의 영향력이 좀 더 크다. 하지만 참가자가 많아지면 주류가 미는 사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총리 콘클라베’ 추진을 주도하는 의원들의 색깔은 당내 비주류에 가깝다. 김재경 의원은 현재 당 비주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 실무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종구 의원도 비박계 중진 의원이다. 본회의 소집요구서에 서명한 이혜훈·정병국 의원도 비박계다. 박영선·변재일 의원은 민주당 비문 진영에 속해 있다.
민주당 일각에선 “비문 진영이 총리 콘클라베로 손 전 고문과 김종인 전 대표에 표를 몰아 친문을 견제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우리 당은 친문이 최대 계파를 차지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수가 많지 않다. 새누리당 비박계와 우리 당내 비문, 국민의당이 힘을 합친다면 김종인 전 대표가 다득표를 할 수 있다. 김 전 대표가 총리로 나설 경우 비문은 친문 주도로 짜여진 대선판을 뒤흔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문계가 콘클라베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친문 입장에선 당 지도부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총리가 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다. 추미애 대표하고 친문 진영이 교감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콘클라베는 여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아무리 당내 최대 계파라고 해도 국민의당이 친문 총리 카드를 받을까. 새누리당도 받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총리 콘클라베는 아직 전례가 없다. 국회법63조2는 전원위원회가 “위원회의 심사를 거치거나 위원회가 제안한 의안 중 정부조직에 관한 법률안, 조세 또는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법률안 등 주요 의안”을 다룰 것을 요건으로 정하고 있다. 의원들이 국무위원 후보를 추천하는 것은 의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국회법에 어긋난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콘클라베 카드는 개헌 정국을 위한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다른 당직자는 “물밑으로 3당 비주류 의원들 사이에 상당한 조율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표면적으로는 총리 추천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개헌을 염두에 둔 포석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손 전 고문과 김 전 총리는 대표적인 개헌론자다. 비주류가 조직적으로 두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면 이들은 개헌을 감행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뿐만이 아니다. 정치권은 새누리당 비박계 일부 의원들이 콘클라베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배경에도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 비주류도 살길을 찾는 것 아니겠나. 남경필 경기지사와 김용태 의원이 탈당했다. 다른 의원들의 이탈 가능성도 남아있다. 당 밖에서 무엇을 하려면 야권하고 교감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보수를 재편하기 위해서는 국민의당과의 연대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콘클라베를 이용해 스킨십을 계속한다면 비박계의 활동공간이 더욱 넓어질 수 있다”이라고 점쳤다.
청와대가 국회 추천 총리 카드 수용의사를 접을 경우 콘클라베는 실현되기 힘들다. 최근 청와대는 박 대통령 퇴진을 전제한 국회의 총리 추천에 대한 거부 입장을 시사했다. 국민의당은 여전히 선총리 선출론을 고수하고 있지만 정의당은 “지금 중요한 것은 총리 교체가 아니라 헌정 농단의 주범인 박 대통령 교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총리 콘클라베’에 대해 엇갈리는 예측을 내놓았다. 허성무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은 국회에 의해 탄핵 소추 의결을 당하면 자신을 보호해줄 총리가 필요하다. 황 총리보다 나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향후 박 대통령이 국회 총리 추천 카드를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야 3당이 일치된 목소리로 총리를 추천하면 청와대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대통령이 의장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접을 명분이 없다. 야당이 시간을 끌지 않고 내부정리를 잘한다면 콘클라베 방식을 포함한 총리 추천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