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사·성대모사·이벤트 등 패러디 넘어 문화로 자리
인천의 한 카페에 진열된 하야빵과 순시리깜빵. 연합뉴스
11월 21일 인천시 남동구 인근의 한 카페는 독특한 빵을 진열대에 내놓았다. 빵의 이름은 ‘하야빵’과 ‘순시리 깜빵’. 바게트 모양의 ‘하야빵’ 속엔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과일인 ‘라임’이 듬뿍 들어있다. ‘하야빵’ 위쪽 팻말엔 “사장님의 염원을 담은”이라는 문구도 쓰여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차움병원에서 ‘길라임’이란 가명을 사용한 것을 풍자한 빵이다.
성인 남성 주먹크기인 ‘순시리 깜빵’의 주재료는 완두콩이다.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먹는 콩밥을 빗댄 빵으로 완두콩이 들어갔다. 국정농단 사건에 관한 증거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최순실 씨의 범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빵이다. 두 개의 빵 가격은 1700원으로 카페 메뉴 중 가장 싸다.
김형표 카페 대표는 “요즘 TV 뉴스를 보면서 직원들과 함께 ‘쟤네들을 감방 보내 콩밥 먹여야 한다’는 농담을 했다. 이야기 중에 콩을 넣어 빵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생업에 종사하다보니 촛불 시위 현장을 가기가 힘들다. 나름대로 우리만의 방법으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단순한 패러디 수준을 넘어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패러디물에 문화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집회 문화에 등장한 패러디가 인상적이다. 1980년대에는 전쟁터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정부를 상대로 격렬하게 투쟁했다. 지금은 다양한 패러디물이 문화적인 공감대를 일으키고 있다. 곳곳에 스며든 패러디가 풍자를 즐길 수 있는 세대의 폭을 넓히고 있다”고 진단했다.
부산 금정구 인근의 K카페 입구에 걸려 있는 칠판. 카페 주인 임정숙 씨 페이스북 캡처.
음식점과 숙박업소의 각종 이벤트도 ‘하야 문화’의 일부다. 부산시 금정구 인근의 K 카페 입구에 놓인 팻말에는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팻말 옆 화이트보드엔 “우리 대통령은 그분에게 너무도 과분한 국민을 가졌다. 우리는 이제 천만 국민이 박근혜 하야를 외치고 있다”는 글귀가 쓰여 있다. K 카페는 박 대통령의 하야 당일, 모든 커피와 음료를 무료로 제공할 예정이다.
K 카페의 임정숙 대표는 “국민들이 벌인 잔치에 숟가락을 얹자는 느낌으로 진행한 이벤트다. 홍보용이 아닌데 오해하는 분들이 있어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SNS 상에서 ‘튀고 싶어 난리냐’는 공격도 받았다. 그래도 재료비를 후원하거나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바리스타들의 연락이 꾸준히 오고 있다.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시 남구 인근의 W 조개구이집은 이색 현수막과 이벤트로 이목을 끌고 있다. 가게 입구 오른편에 걸린 검정색 바탕 현수막엔 “울산 시민 여러분, 나라 꼬라지가 이게 뭡니까. 마음 같아선 장사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청와대 가서 촛불이라도 들고 싶은데 처자식이 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힘을 내시라고 소주와 맥주를 원가에 드리겠다”는 격문 형식의 글귀가 적혀 있다. W 조개구이집은 현재 소주 1병에 1400원, 맥주 1병은 1800원에 제공하고 있다.
W 조개구이집의 조성훈 사장은 “욱해서 화가 났다. 경상도는 새누리당이나 박 대통령에 대한 애증이 있었다. 인물을 보고 찍어야 하는데 그동안 당을 보고 찍어 후회스럽다. 박 대통령을 당 대표로 뽑은 새누리당도 국민을 기만했다. 완전히 속았다. 촛불시위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집회 참가자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기획했다. 남는 이익이 없지만 하야나 탄핵 등 ‘특단의 조치’가 있을 때까지 이벤트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시 유성구 인근의 B 음식점도 최근 파격적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엔 “밤 장사 하느라 촛불집회 참석을 못해 정말 죄송하다. 박 대통령의 하야 일부터 3일간 소주를 무제한으로 무료 제공하겠다. 단, 청와대·국정원·검찰 간부는 입장 사절”이라는 재치 있는 문구가 쓰여 있다. B 음식점은 애당초 대통령 하야 당일부터 행사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또 하나의 이벤트를 추가했다. 11월 25일 낮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손님들에게 소주를 무료로 제공했다.
신상호 대표는 “누가 보더라도 국정 농단 사건의 피의자는 박 대통령이다. 민초들은 피땀 흘려 일해도 아파트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세상인데 수백억을 해먹었다고 생각하니…박탈감을 느꼈다. 정치권에 엮이지 않은 사람 있겠나. 박 대통령이 도무지 하야를 하지 않을 것 같아 서민들이 목이라도 축이라고 따로 이벤트를 준비했다. 소주를 협찬한 시민들이 있어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부산 해운대구 인근의 I 호텔도 하야 이벤트를 기획했다. 11월 21일 호텔 앞에는 ‘박근혜 하야 BIG EVENT 하야 당일, 전 객실 무료’라는 홍보 현수막 2개가 내걸려 있었다. I 호텔 관계자는 “홍보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데 너무 이슈가 돼서 당황스럽다. 선의로 했는데 오해를 받아 항의를 많이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페이스북에선 중학생 전종호 군이 박 대통령 성대모사로 부른 ‘이 순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가 화제다.
가수 나훈아의 18세 순이 개사곡인 ‘하야하라’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하야하라’는 “꿈을 이루는 나라 만들겠다던 무책임한 근혜는 불통으로 귀닫고, 순실이의 주문대로 온 나라를 누리니 경제위기, 민생도탄, 무너진 안보”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누리꾼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 2016년 최고의 명곡이다”며 환호를 보내고 있다.
박 대통령을 빗댄 성대모사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페이스북에선 중학생 전종호 군(15)이 최근 제작한 영상이 화제다. 영상 속에선 전 군이 박 대통령의 성대모사로 가수 한동근의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해’의 개사곡, ‘이 순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를 부르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순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는 “일년씩, 일년씩 임기 지나가며, 기뻤던 일들이 사라지고 있어, 가루 낸 정책이 모여들고 있어, 버렸던 새누리 돌아오고 있어, 삼켰던 내 비리는 다시 뱉어지고, 뱉었던 그 비리는 다시 삼켜지고”라는 가사가 돋보이는 곡이다. 11월 25일 현재 전 군의 영상은 약 127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약 3만 9000명의 누리꾼들이 ‘좋아요’를 눌렀다.
전문가들은 하야이벤트, 개사곡, 성대모사 등의 ‘하야 문화’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 ‘박근혜 하야’는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키워드다. 그 공감을 기회로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잡고, 어떤 이들은 마케팅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부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다양한 욕망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푸는 것이다. 이들의 메시지가 ‘하야’로 통일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