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K 폭탄’ 불발되면 ‘창’도 닫힌다
▲ 지난 15일 이회창 후보가 서울 노량진의 한 분식집에서 국수를 먹고 있다. 귀족 이미지가 강한 이 후보는 서민계층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
출마선언 직후 단숨에 20% 중반의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2위로 올라선 이회창 후보의 힘은 이른바 ‘원조’ 보수세력의 ‘한’과 ‘열망’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여러 매체들이 이명박 후보를 경제 보수, 이회창 후보를 정치 보수라고 가르고 있지만 속내는 역시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유권자들의 기대치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선 3수 도전을 선언한 이회창 후보가 서 있는 땅은 그래서 이명박 후보와 많은 측면에서 겹친다. 이런 현상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50%대 중반의 고공행진을 하던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40% 초반~30%대 중반까지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 대선의 불확실성이 증폭된 것이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10% 중반에서 발이 묶이는 상황에서 ‘뻔한 승리’가 예상됐던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단숨에 10% 이상 잘라낸 이회창 후보의 승부처는 그래서 역시 이명박 후보에게서 찾는 게 정확한 지점일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출마선언에서부터 줄곧 이명박 후보를 ‘불안한 후보’라며 주공격 타깃으로 삼고 있는 데서도 확연해지는 부분이다. 이회창 후보가 이명박 후보를 향해 제기하고 있는 불안감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보수세력을 자극하는 제1 요소인 대북정책이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남북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이명박 후보를 향해 이회창 후보는 “대북정책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념적 색채가 불투명한 후보가 어떻게 보수세력의 대변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그의 공격은 즉각 보수단체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것이 가장 큰 그의 정치적 기반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이명박 후보가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낙마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스페어 후보론’으로 말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선출된 공식 후보다. 이명박 후보가 검찰의 김경준 씨 송환 수사에서 결정타를 맞게 될 경우 후보자격 자체가 박탈될 수도 있다고 이회창 후보 측은 보고 있다. 이회창 후보가 이런 위험이 현실화될 경우 자신이 보수세력의 대표로 대선에 임하겠다는 논리다.
다음은 역시 한나라당 경선 후유증이 이회창 후보가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틈새를 만들어줬다는 점이다. 이명박 후보는 경선 승리 후 당직 개편과 선대위 구성 과정에서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 측 인사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곧 내란 수준의 당내 갈등으로 비화됐다. 무엇보다 박 전 대표가 ‘불편한 심기’를 가진 상황은 이회창 후보에게는 파고들 수 있는 ‘틈새’였고, 이명박 후보에게는 막아지지 않는 ‘빈틈’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노렸던 이 세 가지의 틈새는 BBK주가 조작사건을 중심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 이명박 후보가 BBK 사건 수사결과 ‘치명상’을 입게 된다면 박 전 대표의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이회창 후보로의 보수세력 결집이라는 시나리오가 완성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회창 후보의 정치적 가능성은 BBK 사건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개의 틈새 가운데 하나는 서서히 닫혀가고 있다. 바로 ‘정도’를 선택한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선택 때문이다. 박 전 대표가 이명박 후보에 대해 완전한 지지를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이회창 후보의 출마에 대해 “정도가 아니다”고 비판한 것이다. 박 전 대표의 이런 발언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박 전 대표가 ‘입’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가 출마를 선언한 직후 CBS-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24.8%였다. 이명박 후보는 38.5%로 내려앉았다.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이 살아있는 영남과 충청권에서 이회창 후보로의 ‘쏠림현상’이 뚜렷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이회창 후보의 출마를 비판한 뒤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40.7%를 기록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20%로 내려앉았다. 이명박 후보는 대구 경북에서 7.8%P 오른 반면 이회창 후보는 5.6%P 빠졌다. 부산 경남에서도 이명박 후보는 5.6%P 올랐고, 이회창 후보는 11.3%P나 급락했다.
이회창 후보가 기대를 걸었던 ‘연고지’ 충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중앙일보 여론조사팀의 지지율 조사에서 출마선언 직후 이회창 후보는 충청에서 이명박 후보(26.8%)를 제치고 37.1%를 얻어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는 박 전 대표의 ‘정도 발언’이후에는 23.6%를 얻어 27.2%를 기록한 이명박 후보에게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보수세력의 힘을 믿고 그의 표현대로 ‘단기필마’로 나선 이회창 후보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념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지역적으로 충청이라는 구도 속에 놓인 이회창 후보가 자력으로 이념적, 지역적, 계층적으로 ‘중원’으로 나오기 어려운 상황은 이 후보의 정치적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지난 선거운동 기간 중 상대방의 공격을 통해 이회창 후보에게는 ‘부패한 귀족’이라는 인상이 아직도 씻기지 않고 남아 있다. 판사를 거쳐 총리를 지낸 뒤 집권여당과 거대정당의 총재를 지낸 그의 이력은 확실히 서민과는 차이가 난다. 이런 화려한 이력은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에 호화 빌라 사건, ‘차떼기’로 불리는 불법 대선자금 등으로 부패 이미지와 겹쳐졌다.
이념적으로 극우 보수성향에 지역적으로 민주당 이인제 후보와 국민중심당 심대평 후보, 박 전 대표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명박 후보 등이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충청이라는 한계에 계층면에서도 서민층이라는 중원을 차지하기 어려운 정치적 구도 속에 이회창 후보가 갇혀 있는 셈이다. 여기에 72세라는 이회창 후보의 나이도 걸림돌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 ‘인생은 70부터’라는 말이 있지만 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의 ‘생물학적 연령’과 ‘건강’은 여전히 유권자들에게 주요한 체크 포인트의 하나다.
이런 현실적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이회창 후보가 노구를 이끌고 대선판이라는 전쟁터에 단기필마로 나선 배경에는 역시 BBK 주가조작사건이라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회창 후보는 가는 곳마다 “한나라당 후보의 ‘사고’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 이런 관측이 수그러들지 않는 걸까. 경기고-서울대를 나와 ‘대쪽 판사’로 유명세를 치렀고 두 번이나 유력 대선주자로 뛴 이회창 후보의 막강한 인맥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이회창 후보의 캠프에는 BBK 의혹을 잘 알 수 있는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법률지원단 소속 이헌, 정주교 변호사 등이 그들이다. 한나라당 경선 당시 당 검증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당시 이명박 박근혜 경선 캠프로부터 상세하게 제출받은 BBK 관련 자료를 충분히 파악했던 인물들이다.
여기에 당시 박근혜 경선후보 캠프에서 법률특보를 맡아 BBK 관련 내용을 상당 수준 파악한 정인봉 변호사도 이회창 후보를 돕고 있다. 김경준 씨가 귀국한 16일 이회창 후보는 “BBK 문제가 대선에서 이렇게 큰 이슈가 된 이상 조속하게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회창 캠프의 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은 “땅 투기와 돈 투기 의혹, 탈세 등으로 얼룩진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도 되는 것인지 국민은 심각한 인식의 혼란을 겪고 있다”면서 “이 후보는 더 이상 국민을 호도, 협박하지 말고 대선후보직 사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명박 후보의 ‘사퇴’를 거론할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명박 후보 중도 낙마론’은 이명박 후보가 BBK 수사에서 살아남을 경우 ‘살신성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명박 후보가 BBK 수사를 뚫고 나갈 경우 박 전 대표가 이 후보를 버릴 명분이 없어진다는 측면에서 박 전 대표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자력으로 중도세력을 껴안을 수 있을 역량도 부치는 상황이다. 정치권이 이회창 후보에게 대선 완주 자체에 대해 의심하는 눈초리를 쉽게 거둬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마도 이회창 후보가 대선 완주를 위해 우선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이 ‘자생불가론’인지도 모른다.
정기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