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악재 ‘뻥뻥’…향그러운 촛불만 남고 ‘병신년’아 가라
‘최순실 게이트’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 이슈 블랙홀이었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렇게 2016년은 최순실로 마무리됐다. 100~200년쯤 뒤의 수능 수험생들이 한국사 시험공부를 한다면 ‘2016년 최순실’이라 암기할 듯하다. 그만큼 최순실은 하반기 대한민국의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 이슈의 블랙홀이었다. 그렇지만 2016년 한국 사회에는 유독 대형 이슈들이 많았다. ‘최순실’이라는 세 글자만 아니었다면 수백 년 뒤 수험생들이 2016년과 관련해 외워야 할 단어가 훨씬 더 많았을 수도 있다. 마치 이슈의 춘추전국시대 같았던 2016년을 진시황이 천하통일하듯 최순실 이슈가 빨아들인 모양새다.
# 춘추시대 같았던 1~5월 ‘춘추 5패’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춘추전국시대. 그만큼 통일을 이루지 못한 중국 대륙을 다양한 세력들이 분할하고 있었고 통일을 이루기까지 다양한 세력과 인물들이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갔다. 2016년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이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닮아 있다. 그만큼 대형 이슈가 많았던 한 해였기에 ‘2016년의 10대 뉴스’ 정도로는 소개가 쉽지 않을 정도다.
2016년 가장 먼저 등장한 이슈의 패자는 지난 2월 한국 사회를 강타한 ‘여자연예인 성매매’ 사건이다. 성매매 혐의로 1, 2심에서 모두 유죄를 받았던 성현아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직후 또 다른 여자 연예인들의 성매매 사건이 불거진 것. 게다가 성현아 사건 당시의 브로커가 이번에 또 다시 성매매를 주선한 혐의를 받았다. 결국 유명 여가수 한 명과 걸그룹 출신 여가수 등이 성매매 혐의로 약식기소 처분을 받았으며 결국 이를 받아들여 유죄가 확정됐다. 그나마 정식재판까지 가지 않아 실명은 공개되지 않고 이니셜로만 기사화되면서 이슈의 확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두 번째 패자는 ‘알파고’다.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는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바둑 대결을 벌였고 결국 이세돌 9단이 1승 4패로 지고 말았다. 가장 창의적인 바둑을 두는 프로기사로 유명한 이세돌이었기에 알파고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지만 인공지능 알파고는 생각보다 훨씬 강자였다. 비록 바둑 대결이었지만 알파고의 여파는 인공지능 업계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확산됐다.
세 번째 패자는 ‘4·13 총선’이다. 20대 국회가 여소야대가 되는 결과를 불러온 이번 총선은 다양한 이슈를 생산해냈다. 특히 새누리당의 공천 파문이 선거 기간 내내 화제가 됐으며 그 과정에서 김무성 전 대표의 옥새파동이 불거지기도 했다. 결국 4·13 총선으로 마련된 여소야대 국회의 공천 파문으로 드러난 친박과 비박의 불화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거치며 끝내 새누리당 분당으로 치닫고 말았다.
네 번째 패자는 ‘강남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지난 5월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의 유흥가에 위치한 남녀공용화장실에서 한 20대 여성이 아무 이유 없이 흉기로 여러 차례 찔려 숨지는 사건이 불거진 것. 결국 평소 조현병을 앓아온 김 아무개 씨가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과정에서 ‘여혐’ 논란이 촉발됐다. 이로 인해 강남역 인근에 피해자를 추모하는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 수만 장이 붙었고 관련 집회도 이어졌다. 한편 1심 법원은 피의자 김 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하며 치료감호와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을 명령했다.
5월 28일에는 추모 포스트잇이 서울 구의역으로 향했다. 다섯 번째 패자인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 사고’가 불거진 것.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와 도어 사이에 끼는 사고를 당한 용역업체 직원 김 아무개 씨는 19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2인 1조로 해야 하는 작업을 인원 부족이라는 이유로 홀로 작업한 김 씨의 가방 안에는 컵라면이 발견돼 시민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이 사건을 통해 SNS에서 ‘흙수저’ ‘헬조선’ 등의 단어 사용이 급증하기도 했다.
이슈의 춘추시대가 마무리되는 5월은 유난히 강력 범죄 사건이 많았다. 전남 흑산도에서 여교사 집단 성폭행 사건이 불거졌으며 강남역에 이은 수락산 묻지마 살인사건까지 더해진 것. 그만큼 민심은 흉흉했다.
# 전국시대로 돌입한 6~10월 ‘전국 7웅’
6월은 또 다시 연예계 이슈가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이슈의 전국시대가 시작된 6월 초 한류스타 박유천의 성폭행 피소 사건이 불거진 것. 첫 번째 웅인 ‘연예인 성폭행’ 이슈는 그렇게 시작됐다. 박유천이 ‘화장실’과 연루된 4건의 성폭행 사건에 연이어 연루되며 한국 사회를 뒤흔들더니 방송인 유상무, 배우 이민기, 배우 이진욱, 가수 이주노, 배우 엄태웅 등이 연이어 성폭행과 성추행 등 성범죄로 고소당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건에서 피소 연예인들은 무혐의를 받았으며 오히려 피해자라며 고소를 했던 여성들이 무고와 공갈 등의 혐의로 피의자가 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눈덩이처럼 커진 이슈에 박유천과 엄태웅의 성매매 혐의가 더해졌다. 2016년 여름은 그만큼 뜨겁게 흘러갔다.
7월에는 대기업 회장의 성매매 스캔들이 불거졌다. 바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성매매 스캔들’이 두 번째 웅이다. 7월 초 삼성그룹은 느닷없이 불거진 이건희 회장 사망설로 시름했지만 이내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인터넷 독립언론 <뉴스타파>가 이 회장의 성매매 의혹이 담긴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삼성그룹은 고개를 떨궜다. 사실 2016년은 삼성그룹에 매우 암울한 한 해였다. 이 회장의 성매매 스캔들로 시작해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이혼 소송,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 등이 연거푸 불거진 것. 게다가 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삼성은 힘겨운 위치에 내몰려 있다.
성주군민들의 사드 반대 상경집회. 고성준 기자
세 번째 웅인 ‘사드 배치’ 소식도 2016년 여름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경북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정부 발표 이후 성주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 주민들의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났으며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인 사드 배치 소식은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연결돼 한한류 등의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드 관련 문제는 2017년에도 계속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의 외교 문제부터 대선에서의 쟁점화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웅인 이화여대 사태는 사실 그리 큰 사안이 아니었다. 이화여대가 평생교육 단과대학인 일명 미래라이프 대학을 설립하기로 하면서 이화여대 재학생들이 본관 점거 시위를 시작한 것. 총학생회나 운동권이 주도하는 기존 대학 시위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진행된 이화여대의 시위는 민중가요가 아닌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 등의 대중가요를 부르며 진행됐다. 이런 달라진 이화여대생들의 시위는 이후 정유라 특혜 논란 등이 더해지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도화선이 된다.
다섯 번째 웅은 농민 백남기 씨 사망이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 백 씨는 결국 2016년 9월 25일 사망했다. 안타까운 백 씨 사망이 더 큰 이슈로 확산된 데에는 사망진단서에 있다. 주치의였던 서울대학교 백선하 교수가 사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록하면서 논란을 야기한 것. 이를 바탕으로 경찰이 고인의 사체를 부검하려 하고 유가족이 이를 반대하면서 논란이 가열됐다. 결국 경찰의 부검영장 강제집행이 무산됐고 고인의 장례가 치러지는 것으로 논란은 일단락됐다.
여섯 번째 웅은 바로 ‘김영란법’이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란 법률인 김영란법이 9월 28일부터 시행됐다. 공직자는 물론이고 언론사, 사립학교와 유치원 등의 임직원 등이 적용대상인 김영란법은 시행을 앞두고 다양한 논란이 제기됐다. 시행 초기 대학생이 교수에게 건넨 캔 커피도 김영란법에 저촉된다는 점 등을 두고 혼란이 가열되기도 했다.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 등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법으로 마련됐지만 벌써부터 김영란법을 피해가는 편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일곱 번째 웅은 경주지진이다. 지난 9월 12일 오후 7시 44분쯤 경북 경주시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관측된 것. 지난 1928년 지진 관측을 시작한 이후 한반도에서 발생한 가장 규모가 큰 지진이었다.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부산, 울산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한동안 여진이 지속됐다. 경주지진으로 경남 지역의 활성단층인 양산단층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양산단층 부위에 원자력 발전소가 여러 개 모여 있기 때문이다. 경주지진은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라는 인식에 강한 의문 부호를 남기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걱정거리를 안겼다.
# 시황제의 등장(?) 이슈의 블랙홀 최순실 게이트
10월 이후 모든 사회적인 이슈는 하나의 블랙홀에 빨려들고 말았다. 최순실이 그 주인공이다. 10월 들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쳐주곤 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청와대는 이를 강하게 부인해왔다. 결국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공개하면서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 시작됐으며 한국 사회의 모든 이슈가 순실 게이트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었다.
대규모 촛불집회가 시작됐고 12월 3일에 열린 6차 촛불집회에는 전국적으로 사상 최대인원인 232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결국 특검이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돌입했으며 국회에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건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의 청문회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진행 중이다.
중국 역사에서 진의 시황제는 춘추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시켰다. 그렇지만 진나라는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유방과 항우가 패권을 다투는 시기를 거쳐 한나라로 통일된다. 2016년 대한민국의 다양한 이슈가 춘추전국시대와 닮아 있다면 2017년에는 항우와 유방이라는 두 거대한 이슈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형국으로 진행될 개연성도 크다. 아무래도 2017년은 헌재의 탄핵심판과 대통령 선거라는 두 개의 이슈가 화제를 양산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과 달리 2017년에는 밝은 소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헌재의 탄핵심판 결과에 따라, 대선 결과에 따라 희망적인 소식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암울한 정국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쏟아져 나온 촛불민심이야말로 2016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국민들의 가슴 속에 빛나고 있는 희망이 아닐까.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
희망 던진 2016 인물 ‘박준영 변호사’…파산도 불사하고 재심 변론 올인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가 공동 집필한 <지연된 정의> 박 변호사는 ‘재심 전문 변호사’다. 재심이란 확정된 유죄 판결에 대해 다시 재판을 여는 비상구제절차다. 하지만 형사사건, 특히 중범죄 사건 재심은 ‘하늘의 별따기’라 불린다. 경찰‧검찰의 수사가 잘못됐을 뿐 아니라 법원의 판결마저도 오류가 있었음을 모두 입증해내야 한다. 박 변호사는 지난 2007년 수원 노숙소녀 사망사건을 시작으로, 삼례 3인조 강도치사사건과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 등 2016년 두 건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사기관과 이를 ‘외면’한 재판부, 사과하지 않는 공권력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박 변호사는 ‘파산 변호사’로도 불린다. 그는 돈을 벌지 못했다. 월급을 주지 못하니 직원이 없었고, 월세까지 밀려 결국 사무실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는 “내 의지로 망했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맡은 사건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못 배우고 가난했으며, 일부는 장애가 있는 ‘사회적 약자’였다. 박 변호사는 2007년 이후 이들을 직접 찾아 사건을 수임하면서도 별다른 영리활동이나 유료 변론을 하지 않았다. 공익변론, 무료변론이 그가 최근까지 해온 일의 전부다. 그는 그동안 스스로 ‘파산’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박 변호사의 이야기는 지난 8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연재된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시민들이 반응했고, 사흘 만에 목표 후원금인 1억 원을 넘기더니 11월 11일 마감됐을 때는 5억 6797만 8000원으로, 다음 스토리펀딩 역사상 최고 후원 액수를 기록했다. 박 변호사는 후원금의 상당 부분을 앞서의 재심사건 관계자들에게 건넸다. 최근에는 그의 삶과 그가 맡았던 재심 사건을 다룬 책 두 권이 출간됐다. <우리들의 변호사>에는 그의 인생사와 함께 재심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개천에서 용이 난’ 성장 이야기와 “처음엔 유명해지고 싶어 재심 사건에 뛰어들었다”는 그의 솔직한 태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지연된 정의>는 지난 2014년부터 박상규 기자와 함께 한 재심프로젝트에 대한 심층 르포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공권력과 법이 어떻게 다뤄 왔는지 아프게 보여준다. 한편 오는 2017년 2월엔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이 개봉한다. 배우 정우가 ‘이준영’ 역할을 맡았는데 이준영은 박준영 변호사를 모티브로 한 역할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