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멤버들, 움츠렸던 어깨 ‘활짝’
하지만 ‘압박 피해자’로도 볼 수 있는 이들의 움직임이 새해 들어 예사롭지 않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의도와 적용 방식이 낱낱이 드러난 탓일지도 모른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상징하는 ‘사회비판의 목소리’가 2017년 영화계를 관통하는 주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더는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영화계의 선언으로 읽힌다.
영화 ‘변호인’ 스틸 컷. 블랙리스트에 오른 송강호는 이번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선보인다.
# 블랙리스트 송강호…이번엔 5·18
배우 송강호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가 2013년 주연한 영화 <변호인>이 결정적인 계기다. 영화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모습을 담았다. 1000만 관객이 선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현 정권 주요 인사들의 심기는 불편했던 것으로 최근 드러났다. 때문에 <변호인>은 청와대 주도로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출발로도 지목되고 있다.
심지어 <변호인>의 제작비 일부를 투자했다는 이유로 CJ E&M의 이미경 부회장이 청와대로부터 경영 퇴진을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엄밀히 따지면 CJ E&M은 <변호인>의 메인투자사도, 배급사도 아니다. 단지 기업의 계열 투자사인 CJ창업투자(현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를 통해 제작비 일부를 책임진 부분 투자로 참여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권은 이미경 부회장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압박했다. ‘정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에 돈을 댔다는 이유’라는 것이 영화계의 시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호인>에 참여한 영화인들은 올해 비판적 메시지를 내는 영화를 잇달아 내놓는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상징되는 외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만한 행보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컷
<변호인>을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남북한 이슈로 향한다. 이르면 2월부터 촬영을 시작하는 <강철비>가 그의 신작이다. 북한 김정일 사후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전쟁 위기에 처한 남북한의 긴박한 상황을 그린다. 곽도원과 정우성, 이경영이 주연을 맡은 사실에서는 스타들이 이 영화에 얼마나 높은 관심을 갖는지 엿보이게 한다.
# 정권 말 겨냥…사회비판적 목소리 제기
사실 영화계에서 최근 3~4년 동안 정치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의 제작 편수가 다소 줄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상업영화의 개성을 띠고 재벌 권력을 비판한 <베테랑>이나 정치와 재벌, 언론의 긴밀한 유착을 고발한 <내부자들> 등 일부 작품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허구의 이야기’임을 강조해왔다. 실제 영화계 내부에서도 정치색 짙은 영화의 기획 시도에 우려를 표하는 의견도 존재했다. 투자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변호인>의 배급을 맡은 투자배급사 NEW가 영화의 성공 직후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은 사실, 정권의 주요 이슈인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판도라>가 투자 단계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 개봉까지 지연된 상황은 영화계의 ‘우려’를 ‘확신’으로 바꿔놓은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사회 전반에 비판적 목소리가 높아진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 ‘정권 말기’라는 사실이 영화계의 움직임을 분주하게 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투자배급사의 한 관계자는 ‘정권 말기의 특수성’을 꼽았다. 이 관계자는 “정권 초기 영화를 포함해 비판적인 성향의 콘텐츠에 대한 압박의 움직임은 완고해질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정권 교체 시기가 되면 엄격했던 분위기가 느슨해지고 영화를 기획하고 투자하는 입장에서도 어떠한 제약을 두지 않고 다양한 소재로 눈을 돌리게 된다”고 밝혔다.
영화 <판도라> 스틸 컷.
대통령의 탄핵 사태로 인해 대선의 시계까지 앞당겨졌다. 이에 힘입어 사회 비판적 성격의 영화 제작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상징하는 ‘비판적 시선’이 이젠 흥행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마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단연 주목받는 영화는 김윤석과 하정우, 강동원이 출연하는 <1987>이다. 영화는 1987년 6월 일어난 6·10항쟁을 다룬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 등 직접 민주주의를 꽃피운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민운동을 스크린에 완성하는 첫 시도로, 제작비가 100억 원에 이르는 대작이다.
<1987>의 투자배급을 CJ가 맡기로 한 사실은 흥미롭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CJ의 <1987>의 투자배급 확정 과정은 불과 몇 주 만에 빠르게 이뤄진 것으로 안다”며 “현 촛불집회와 비견되는 6월 항쟁을 다루는 이야기가 지금 관객과 충분히 소통할 것이라는 내부의 판단이 있었지만 최근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더 과감하게 나서려는 의도도 간과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