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면허 없이도 운영 가능한 의료생협 세워 나이롱 환자 모집 보험금 편취 급증
일명 ‘바지원장’을 앉히고 돈을 챙기는 사무장 병원이 기승이다. 사진은 노인 진료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일요신문 DB
2014년 초, A 씨는 10년간 운영하던 개인병원을 접었다. 치열해진 경쟁 탓에 경영난이 지속돼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웠다. 그러다 의료 관련 사이트에서 한 병원의 구인광고가 눈에 띄었다. 직접 운영할 때보다 근무조건도 무난했고, 급여 역시 파격적이었다. 앞서의 병원이 채용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법인화가 예정돼 있으니 3개월만 병원 개설자로 명의를 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지방의 한 종합병원에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던 B 씨는 최근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지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한 사업가가 있는데, 거기에 병원을 짓고 있으니 병원장으로 들어와 달라는 것이다. 대신 명의를 먼저 빌려달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동안 월급만 받고 살아온 B 씨는 병원장이라는 타이틀을 쉽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지인과 함께 만난 사업가는 “다른 걱정 말고 진료나 잘 해달라”고 했다.
최근 “사무장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경찰이 적발한 사례를 재구성한 모습이다. 앞서의 A 씨를 고용하고 명의를 빌려 병원을 운영한 이, 다시 말해 일종의 사무장은 총 40억 원의 부당 이득을 챙겼다. 이로 인해 명의를 빌려준 A 씨도 형사처벌을 받게 됐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계획적으로 사무장 병원을 운영하다 적발된 곳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일반 의사들이 가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무장 병원이란 비의료인이 의료인을 고용하고 병원 개설 및 운영을 주도하는 형태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한의사 또는 비영리 법인만이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다. 즉, 사무장 병원은 불법 의료기관이다.
사무장 병원을 법으로 금지하는 이유는 비의료인 투자자가 따로 있는 병원 특성상 부실 진료 위험 때문이다. 과도하게 영리를 추구하면서 과잉 진료 등 환자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물론, 허위‧부당 청구 등 보험사기 발생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수사기관이 매년 집중 단속을 벌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무장 병원은 오히려 해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2016년 11월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같은해 8월부터 3개월간 의료·의약 분야 불법행위 특별단속을 실시한 결과 사무장 병원이 28.2% 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적발 건수가 늘어나는 만큼 법망을 피하는 수법도 함께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반적인 사무장 병원 형태는 사무장 개인이 의료인의 면허를 대여해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방식이었다. 의료 면허증이 없어 진료는 하지 않고 미용‧영양 주사 등만 놓으며 병실만 대여하는 일명 ‘모텔형 병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사무장 병원은 운영 도중 의사가 명의를 회수하거나 수사 대상에 오르면 폐업 신고를 하고 다른 의료인을 구해 의료 면허를 대여 받아 새로 개설하는 식으로 운영을 이어갔다. 지난해 12월 환자 수백 명의 진료비를 미리 받고 돌연 폐업해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서울 강남 신사동 소재의 한 교정치과도 사무장 병원이었다.
문제는 최근 기승을 부리는 사무장 병원들은 이보다 더 진화했다는 점이다. 대부분 조직적이고 전문화된 ‘보험사기 집단’이라는 게 수사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대표적인 사무장 병원은 ‘유사 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이다.
의료생협은 조합원과 지역 주민, 취약 계층에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이다. 의사면허가 없어도 조합원 300명, 출자금 3000만 원 이상 등의 요건을 갖추면 지방자치단체장의 승인을 얻어 설립할 수 있다.
협동조합 명의로 부속 병원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2010년 9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생협법) 개정안에 ‘100분의 50의 범위에서 비조합원에 대해서도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면서 의료생협은 매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신종 보험사기는 이런 의료생협형을 통해 이뤄진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개설이 쉬운 의료생협과 사무장병원을 만들어 환자를 모집한 뒤, 허위진단서 발행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와 민간보험사 보험금을 편취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형‧법인형 사무장 병원도 있다. 기업형 사무장 병원은 비의료인 투자자들을 모아 여러 개의 병원을 개설해 하나의 그룹처럼 관리하는 방식이다. 지분 관계가 복잡하고 운영 주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최근 검찰이 집중 단속을 한 뒤에야 일부 실체가 드러난 경우도 있었다.
법인형 사무장 병원은 비영리 재단법인의 경우 의료기관 개설이 비교적 쉽다는 점을 이용해 법인명의로 사무장 병원을 개설하는 방식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의사들이 사무장 병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면허 대여를 꺼리게 되면서 편법으로 생겨난 사무장 병원”이라고 말했다.
사무장 병원 형태가 진화하고 있지만 단속은 쉽지 않다. 내부 고발자의 제보가 없으면 사무장 병원이라는 사실 자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불법 사무장 병원으로 의심돼 수사 선상에 오르더라도 폐업 신고 후 의료기록을 폐기처분하면 사실 관계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사 기관의 집중 단속에도 근절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렇자, 환자까지 불법에 가담하는 등 각종 부작용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전북의 한 사무장 병원은 입원치료가 필요 없는 가짜 환자(일명 ‘나이롱 환자’)를 모아 보험금을 부당 청구했다. 가짜 환자는 총 169명이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허위로 요양급여를 청구한 금액은 57억여 원에 이르렀다.
브로커도 기승을 부린다. 사무장 병원과 약국 수십 곳, 의사‧한의사 수십 명을 연결해 병원 개설을 돕는 방식이다. 브로커들은 의사 소개 비용으로 보통 건당 80만~100만 원과 매달 영업이익 가운데 300만~500만 원가량을 챙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약사는 “브로커가 정보를 잘못 전달하거나 사무장 병원임을 모르고 약국을 개설했다가 병원이 폐업하면서 덩달아 빚만 떠안고 나가는 약국들이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무장 병원 근절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자 처벌 규정을 강화했다. 현행 의료법을 개정해 타인명의를 빌려 의료기관을 개설한 의료인에 대한 처벌규정(5년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형) 가운데 벌금형을 삭제해 모든 처벌이 징역형으로 상향된다. 조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에게 특별사법경찰권을 부여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수사 기관 역시 단속 강도를 높일 예정이다.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의료법 위반뿐만 아니라 수백억 원에 이르는 보험사기의 폐해가 심각하다”며 “국민건강보험공단, 금융감독원 등 유관기관과 공조체계를 유지해 단속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