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들 서로 친인척 교차 채용…수법 지능화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의 ‘장 지지기’ 약속 이행을 촉구하며 국회 사무실에 배달된 빨간 냄비와 쌈장.
당시 이 전 대표의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는 화제를 뿌렸다. 이 전 대표(전남 순천시)의 국회 사무실엔 빨간 냄비와 쌈장이 배달됐다. 사무실 문 왼쪽 벽엔 “국민의 명령이다. 정현아, 장 지지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전 대표의 순천 사무실에도 장단지가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대표가 끓는 가마솥에 자신의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이 담긴 패러디 사진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권력자들의 거짓말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점을 찍었다. 지난해 11월 27일 최 씨의 최측근 차은택 씨는 최 씨의 주선으로 김 전 비서실장을 약 2년 전에 만났다고 폭로했다. 김 전 실장은 “최 씨를 알지도 못하고 통화한 적도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그의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났다.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특위 2차 청문회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후보 검증 청문회 영상을 공개하며 “김 전 비서실장은 당시 박근혜 캠프의 법률자문위원장이었다. 최 씨 이름이 김 전 위원장이 동석한 장소에서 수차례 거론됐는데 몰랐다는 것인가”라고 추궁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죄송하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최순실이라는 이름을 못 들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최 씨를 알지는 못한다”고 밝혔다. 누리꾼들은 김 전 실장을 ‘청문회 역사상 최고의 악인’으로 빗대 조롱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말 바꾸기도 도마에 올랐다. 조 장관은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약 1만 명의 문화·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정해왔다. 하지만 일각에선 “조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 재임 시절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연일 제기됐다.
1월 9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특위 7차 청문회에 출석한 조 장관은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의 반복된 질문에 “예술인들 지원을 배제하는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18일 결국 21시간 동안 특검의 조사를 받았다. 현직장관이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것은 조 장관이 처음이었다.
시민들은 이러한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분노했다. 조 아무개 씨(32)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 하는 것인지, 스스로 죄책감은 없는지가 헷갈린다. 화가 난다”고 밝혔다. 송 아무개 씨(32)도 “보통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예외 같다. 표정 변화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 보탰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까닭은 뭘까. 황상민 연세대 전 심리학과 교수는 “김 전 실장이나 조 장관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심리 상태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본인의 무능을 자임하거나 처음부터 나쁜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김 전 실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는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무능력을 선택했다. 최고 권력자를 위해 나쁜 사람보다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로파일러 출신인 표창원 민주당 의원 역시 “이들은 하얀 거짓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데 마음속으로 사건의 결론을 미리 내리는 방법이다. 김 전 실장이나 조 장관은 진실을 캐묻는 행위는 ‘지나치게 과장된 정치적 공격이다’고 여긴다. 우리의 상식과 상당히 다른 형태로 결정을 내리는데 이를 범죄심리학 용어로 ‘상위가치에의 호소’라고 한다. 이들은 종북 좌파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과 애국, 대통령 보좌 등의 보다 중요한 가치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거짓말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다. 지난해 11월 4일 박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해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다. 필요하다면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검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11월 30일 “저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거부했다.
표 의원은 “박 대통령이 하얀 거짓말을 시작했다. 행위 부정이 아닌 의도에 대한 부정을 시작했다. 스스로 선의라고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끝까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방어기제가 발동한 순간 양심의 소리는 묻혀버린다. 자각의 수면 위로 못 올라오게 눌려버리는 것”고 분석했다.
거짓말 뿐 아니라 갑질 논란 등도 정치인들의 단골 메뉴다. 서영교 의원은 자신의 친동생을 19대 국회 비서관으로 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5년 1월 27일자 <일요신문> 참고) 서 의원의 딸 역시 국회 인턴 비서로 채용됐다. 박인숙 바른정당 의원도 5촌 조카를 5급 비서관으로, 동서를 인턴 직원으로 채용했다. 박 의원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친인척 보좌관들을 내보냈다. 서 의원 역시 사과 직후 민주당을 탈당했다. 가족 보좌진 채용 논란으로 민심은 들끓었다.
민주당 비서는 “의원회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40~50명의 보좌진들이 무더기로 잘려 나갔다. 하지만 속으로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능력도 안 되는데 친인척들을 공짜로 챙겨준 점이 걸려서 일벌백계를 당하니 속이 시원했다. 요즘은 수법이 더 지능적으로 변했다. 의원들이 서로 친인척을 교차해서 채용하는 방식이다. 걸려도 우연이라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의원끼리 미리 양해를 한 뒤 서로 가족들을 보좌진으로 채용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은 갑질 논란에 휩싸였다. 전 의원은 최근 17개 시·도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국사 등 전국 5548개 중·고교에서 4년 동안 출제한 5개 과목의 시험지 원본 파일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서울시교육청을 포함해 13개 교육청은 “내놓을 수 없다”고 반발했고 일선 교사들은 전 의원의 무리한 요구에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1월 18일 전희경 의원실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갑질은 아니다. 국회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자료 요구 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출 기한도 3주 정도 연장했다. 자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 제출을 하지 않으면 정당성 여부에 대해 검토를 하겠다“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정치인들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꼬집었다. 황 전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박 대통령 또는 김 전 비서실장과 같은 인간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성이 나쁘다며 개인의 탓으로 돌릴 때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시스템의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하면 안 된다고 교육을 시킨다. 그렇게 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출세길이 열린다. 조직 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뚜렷이 표현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