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수에 취약한 약점 이용해 비상식적 행위 요구…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배우’가 아니라 ‘여배우’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담겨 있어요. 막연한 기대심리도 있고, 여배우니까 현장 분위기를 살리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되도록 늦게까지 어울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여배우니까 괜한 구설에 휘말리면 대중적으로도 더 이미지 손상이 크기 때문에 서럽고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참고 넘기는 때가 많죠.”
지난 1월 16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중심이 돼 영화계 내 성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간담회가 열렸다. 지난해 영화 촬영 도중 상대 남자 배우가 동의 없이 성폭력을 행사해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여배우와 상반신 노출 장면을 감독 임의대로 공개해 고통을 호소했던 배우 곽현화 등의 현안이 떠들썩한 상황이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동안 영화계에서 쉬쉬하며 넘기던 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곽현화의 경우 지난 2012년 영화 <전망 좋은 집>을 촬영하며 상반신 노출 장면을 촬영했다. 하지만 이를 공개하는 것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혀 극장 개봉될 때는 삭제됐으나 이후 IPTV에 유통될 때 ‘감독판’ ‘무삭제 노출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채 그의 상반신 노출 장면이 대중에 공개됐다.
영화 ‘전망 좋은 집’ 홍보 스틸 컷
이에 곽현화는 2014년 4월 이수성 감독을 고소했으나 얼마 전 담당 재판부는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촬영, 무고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이수성 감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곽현화는 “이번 법정 소송으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며 “억울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대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여성학, 그때는 이런 게 왜 필요하지 했었다. 사회의 많은 곳에서 여성은 소비되고 이용된다는 것, 그래서 여성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그 의미를 배우는 학문이 아직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곽현화의 경우,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법적 대응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지만 대다수 여배우들은 냉가슴만 앓으며 참고 넘기곤 한다. 작품을 만들고,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 할지라도 여성으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이미지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유명 여배우 A는 노출 수위가 높은 영화의 주연 자리를 맡았다가 이를 번복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 연출을 맡은 감독이 “벗은 몸을 보여줄 수 있겠냐”는 말을 건넨 것이 발단이었다. A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고, 이를 문제 삼았다. 결국 A는 하차했고, 이 사건의 내용이 투자배급사에도 공유되며 결국 이 영화는 꽤 유명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이 중단됐다.
이 감독 측근의 설명은 이렇다. “부분적으로 대역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여배우의 몸을 알아야 비슷한 몸매를 가진 대역 배우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만 이 같은 의도가 있었더라도 A의 소속 매니지먼트를 통해 공식 요청하거나, 의상 감독 혹은 촬영 감독 등 주요 스태프 등과 상의한 후 정식 루트를 통해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달했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결국 여배우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이 감독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요청으로 이어졌다는 판단에 무게가 실린다.
노출신이나 베드신은 ‘몸과 몸의 대화’이기 때문에 대본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손이 닿는 부위, 노출 수위, 접촉 정도 등 더욱 디테일한 디렉팅과 카메라 앵글이 요구된다. 세트 세팅이 끝난 현장에는 촬영 감독을 제외하곤 오로지 배우들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퇴장하고, 지나치게 길게 촬영하거나 예정에 없던 추가 촬영을 요구하는 것도 되도록 자제한다.
한 영화에 출연해 노출 연기를 보여준 단역 배우 B는 “감독의 역량이 중요하다”며 “현장에서 감독이 노출 연기를 하는 여배우들에게 대한 배려심을 보여주면 다른 스태프도 더욱 조심하게 된다. 반면 한 촬영장에서는 모두가 지켜보는 개방된 공간에서 노출 연기를 하라고 해서 크게 당황하고 수치스러운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홍보 스틸 컷.
이런 문제 제기는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있었다. 1972년작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찍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남자 주인공과 공모해 여주인공을 맡은 마리아 슈나이더를 강간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의혹이다. 그녀는 지난 2011년 죽기 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며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고 폭로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뒤늦게 “슈나이더는 촬영 내용을 알고 있었고, 단지 (윤활제로) 버터를 사용하는 것만 몰랐다. 그녀가 여배우가 아닌 소녀로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담고 싶었다”고 해명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감독의 비뚤어진 의도가 여배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셈이다.
노출 연기와는 무관하지만 19일 개봉된 영화 <다른 길이 있다>에 출연한 배우 서예지는 지난 11일 진행된 언론시사회에서 “연탄 연기를 마시는 걸 진짜로 해달라고 하셨다. 영화는 정말 배우가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컷을 안 해주셔서 내가 죽을까봐 불안했다”고 가볍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자칫 배우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다른 길이 있다’ 홍보 스틸 컷.
이후 연출을 맡은 조창호 감독은 “대부분의 연기가 연탄가스가 아니었으나 미량의 연탄가스가 흘러 나왔음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당연히 제가 질타를 받아 마땅한 부분이며 배우의 동의와 무관하게 진행하지 말았어야 했음을 크게 반성하고 다시 한 번 서예지 배우에게 공식적인 입장문을 통해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예술을 하는 감독이 배우에게서 더 좋은 연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고민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가끔은 도가 지나친 요구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기며 영화계를 멍들게 하고 있다”면서 “특히 남성 감독들이 대다수인 한국 영화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여배우들을 향한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요구나 처우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