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서울 배곯는 지방…대기업 사업장 떠나면 그 지역 경제 초토화
[일요신문] 지난해 기준 재계 서열(자산총액 기준) 15위 부영그룹은 서울 중구 태평로 옛 삼성생명 사옥을 5717억 원에 매입했다. 1984년 982억 원에 이 건물을 사들인 삼성그룹은 33년 만에 4735억 원의 매각 차익을 거뒀다. 옛 삼성생명 사옥 부지는 조선시대 화폐를 찍어내던 ‘전환국’ 터다. 재계 관계자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돈이 모이는 곳’이란 풍수지리를 믿고 삼성생명 사옥을 본사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임준선 기자.
서초사옥에는 그룹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이 차례로 입주했다. 하지만 서초사옥에 모였던 계열사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와병 후 다시 서울 양재동, 경기도 판교 등으로 분산 이주했다. 이들이 떠난 서초사옥의 새로운 ‘가족’은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 그룹 내 금융 계열사가 될 전망이다.
대기업 본사는 많은 의미와 역사를 담고 있다. 비록 오너 1세대 때를 떠올리면 그룹 주요 계열사가 대형 사옥 한 곳에 모이는 사례가 줄었지만 아직 ‘그룹 본사’는 한국 경제의 상징으로서 여러 경제효과를 유발한다. 본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경기 활성화가 대표적이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우선 대기업 직원들은 출·퇴근 문제로 직장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거주할 가능성이 높다. 유동인구가 늘면 교통·치안 등 주거환경이 개선된다. 학군이 형성되고, 의식주에 필요한 소비가 발생하고 증가한다. 자연스레 서비스직군의 고용 발생이 늘어난다. 주택은 물론 상가 임대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인근 부동산 경기가 꿈틀거린다.
심지어 대기업 사옥이 건립될 것이란 기대만으로도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기도 한다. 부동산중개법인 리얼티에셋 관계자는 “현대차가 매입한 옛 한전부지 인근 부동산 실거래가가 30%가량 높아졌다”며 “싸게는 안 팔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돈이 돌기 시작하면 정부가 거둘 기대 세입이 많아진다. 때문에 각 지자체는 지역 균형 발전 등의 이유로 대기업 본사(혹은 사업장)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매입한 옛 한전 부지 전경. 우태윤 기자.
그러나 실제 국내 대기업 본사는 수도권, 그중에서도 서울에 밀집돼 있다. 자산총액 기준 30대 기업 가운데 등기상 본사가 서울이 아닌 곳은 포스코(경북 포항), 현대중공업(울산), KT(경기 성남), LS(경기 안양), 하림(전북 익산), 코오롱(경기 과천), 한진중공업(부산)이다.
이 가운데 포스코는 강남구 테헤란로에 본사 기능을 수행하는 포스코센터를 갖고 있으며, 인천 송도에 포스코건설 사옥을 세웠다. KT는 1999년 김대중 정부의 공기업 지방 이전 계획에 따라 본사를 경기 성남으로 옮겼지만 서초사옥과 광화문사옥을 병행 운영하며, 사실상 서울을 ‘컨트롤타워’로 활용했다.
하림은 최근 강남구 논현동에 신사옥을 지었고, 코오롱은 강남사옥을 별도 운영 중이다. 한진중공업은 건설부문 본사를 서울 용산구에 두고 있다. 즉 30대 기업 가운데 한진중공업과 LS만이 실질적으로 서울 밖에 본사를 두고 있는 셈이다. LS그룹 관계자는 “기업 모태인 LS전선 공장이 안양에 있고, 히스토리가 있다고 판단해 2008년 사옥을 지었다”며 “서울을 벗어나 (사옥 건립 시) 토지 지가에서 이득을 봤고, 안양시 차원의 협력을 구할 수 있는 부분을 고려했다”고 입주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에서도 대기업 본사가 집중된 지역은 서울 중구(8곳), 종로구(5곳), 강남구(5곳)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지역은 서울 내에서 재정자립도가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지역발전포털’에 따르면 중구는 전체 인구가 12만 5642명으로 적은 편이지만 재정자립도는 65.17%로 강남구(65.05%)보다 높다. 이 통계에서 강남구의 인구는 57만 421명으로 집계됐다.
반면 대기업 본사나 주력 사업장이 없는 서울 관악구의 경우 전체 인구는 50만 9725명으로 중구보다 4배가량 많지만 재정자립도는 24.8%에 불과하다. 관악을 지역구로 둔 의원실 관계자는 “구민들을 만나보면 대기업 본사 등 우리 구를 대표할 만한 회사가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밖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해 조선-해운업 대규모 구조조정 사태에서 보듯 대기업 본사나 사업장이 떠나면 인근 경기가 초토화되는 지역이 적지 않다. 최근 전북 군산시는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군산조선소 폐쇄를 철회해 달라”며 릴레이 시위를 시작했다. 서동수 군산시의원은 “군산시민이 28만 명인데 현대중공업에 재직 중인 5000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게 생겼다”며 “군산조선소가 시 경제의 30%를 차지한다. 18년 전 군산시와 전라북도가 현대중공업을 유치하며 200억 원을 지원했는데 이제 와 (사업장을) 폐쇄하면 협력업체와 중소기업이 다 무너져 지역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삼성은 경기 수원, 경북 구미, 경기 용인, 경기 화성 등에 삼성전자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현대자동차는 울산, 충남 아산, 전북 전주 등에 공장이 있고, 기아자동차는 경기 광명, 경기 화성, 광주에 생산라인을 두고 있다. SK는 경기 이천, 인천, 울산, 충남 서산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가동하고 있고, LG는 경기 평택, 경기 파주, 충북 청주, 경남 창원 등에서 제품을 만들고 있다. 포스코는 경북 포항과 전남 광양에 대규모 제철소를, GS칼텍스는 전남 여수에 600만㎡(180만여 평)에 이르는 정유공장을 갖고 있다. 이들 기업은 모두 지역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지자체별로 상황은 다르지만 사실상 세수의 3분의 1 이상을 책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기업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일부 지자체를 제외하면 다른 지역들은 낮은 재정자립도를 보이며 양극화가 심해지는 분위기다. 대기업들 역시 서울 혹은 수도권을 벗어나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과거 대기업의 본사 사옥은 그룹의 얼굴이자 권위를 의미했다”며 “(그때의 잔상으로) 여전히 서울 중심가에 본사를 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룹 경영과 관련된 인적·물적 네트워킹이 전부 서울에 있는데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이 쉽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가 ‘세제 혜택’ 등 단기 처방책으로 대기업들의 지방 이전을 강제할 수 없다면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중해 KDI(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가 전체를 봤을 때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경제는 굉장히 무력화돼 있는 상황이고, (지역경제를 지탱하던) 기존 중공업계열 산업들마저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며 “원론적일 수 있지만 단기적인 해결책은 없다. 각 지역 특성에 맞는 인재를 육성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새로운 사업을 계속 발굴해야 한다. 기업과 지자체, 정부 모두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