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직 안 죽었다” 친노에도 메시지
▲ 인수위 조직 개편안에 거부권을 시사한 노무현 대통령과 아래는 정치 세력화 작업에 착수한 이해찬, 유시민 의원. | ||
노 대통령이 인수위의 조직개편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정계가 들끓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28일 “새 정부의 가치를 실현하는 법은 새 대통령이 서명하고 공포하는 것이 맞다”며 인수위의 조직 개편안이 국회 심의를 통과하더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검토 이유를 “13개 중앙행정기관 통폐합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데 20일 만에 개편안을 마련하고 45개 법안을 처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입장이다.
이명박 당선인이 취임을 하기 전에 정부조직 개편을 마무리하려던 인수위로서는 상당히 난감할 수밖에 없다. 만약 조직개편안이 국회 심의를 통과하게 되더라도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개편안은 다시 국회로 돌아오게 된다. 이 경우 다시 국회 심의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시간적으로 새 정부 출범 전에 조직개편안을 공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인수위는 그동안의 ‘강경론’을 버리고 논란이 되고 있는 부처의 장관을 유보하고 부분 조각을 하거나 정부 직제에 맞춰 ‘선인선 후개각’ 방편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종의 타협안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인수위간의 깊어진 앙금에 비춰볼 때 타협안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나라당 역시 당 차원에서 노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30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노 대통령이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언급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노 대통령이 몽니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안 대표는 또 신당을 향해서는 “정부조직 개편안은 앞날에 대비하고 실용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전폭적인 협력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신당 측은 노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 방침에는 상당부분 공감하면서도 자칫 새 정부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비춰져 지난 대선에서 경험했던 ‘반노’ 여론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수 있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임종석 원내수석부대표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정부개편안을 20일 만에 마련하고 통과시키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발상”이라며 청와대의 입장을 지지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동시에 임 부대표는 “국민들이 장관 숫자가 줄어들고 공무원을 줄인다고 하니까 시원하다는 여론이 우세한 것 같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며 ‘역풍’에 대한 우려감도 감추지 않았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지난 25일 “거부권을 행사하면 한나라당은 4월 총선에서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확보해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횡재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신당 내부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의 ‘몽니’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한나라당이 아닌 바로 신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 역시 노 대통령과 심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손 대표는 30일 “노 대통령이 국회 논의를 지켜보지도 않고 미리 국회와 국민에게 엄포를 놓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고 각을 세웠다. 손 대표는 전날에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노 대통령”이라며 “이렇게 되면 이 당선인이 전횡을 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고 나가는 것밖에 안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이른바 ‘몽니’를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친노그룹의 재결집을 노린 것 아니겠느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의원이 탈당해 일명 ‘무소속 연대’라는 정치세력화 작업에 착수했고 손학규 체제로 들어선 신당이 ‘친노 색깔 지우기’에 나서고 있는 만큼 친노그룹도 어떻게든 생존전략을 구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시각이다. 노 대통령이 정치권의 반발과 부메랑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식적인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한 것은 ‘친노 신당’을 탄생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자기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고 통폐합되는 이해관계자에 호소해서 덕을 볼까 하는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 대통령의 ‘몽니’ 배경에는 퇴임 후 ‘막후 정치’를 노린 고도의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마을에 가만히 눌러앉을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역대 대통령들이 70~80의 나이에도 막후 정치를 벌이는 판에 젊은 나이에 퇴임하는 노 대통령이 그대로 봉하마을에 눌러 앉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지난 27일 참여정부평가포럼 회원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정치와 사상 연구소를 만들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퇴임 후에도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결국 노 대통령이 친노그룹의 재결집을 통해 ‘막후 정치’를 위한 통로 만들기에 나서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 대통령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인수위가 노 대통령의 5년의 성과를 깡그리 무시하는 개편안을 내놓은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성격상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연 노 대통령이 임기 막판에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라당의 주장처럼 ‘쓸 데 없는 몽니’를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퇴임 후 정치구상과 맞물린 의도된 발언인지 임기말 노 대통령의 정치행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