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쫓다 포기 16년 후 재추적 “그놈 담배꽁초다”
피해자의 남편이었던 A 씨는 18년 전 사건 당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A 씨는 “일식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딸 아이한테 ‘엄마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너무 놀라서 일을 하다말고 나왔고 지나가던 경찰차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말하니 집까지 태워다줬다. 가는 길에 119에도 전화를 했지만 집에 갔을 때 아내의 숨이 이미 끊어져 있었다”며 “그날 일 때문에 새벽 5시에 집을 나갈 때 배웅을 해주던 것이 마지막 살아있는 모습이 됐다. 집사람은 원래 식당에서 서빙하는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휴무였고 그날이 휴무일이어서 집에서 김장을 하고 있던 도중에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당시 손목이 등 뒤로 묶여 엎드려 있는 채로 사망해 있었고, A 씨의 넥타이로 목이 조여 있었다. 오 씨의 범행 흔적이 남아 있었다. A 씨의 딸은 당시 초등학생으로 학교가 일찍 끝나 집에 가 엄마가 쓰러져 있는 것을 가장 먼저 확인했고 이웃에 살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A 씨의 아내가 생전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그렇지만 한 형사의 끈질긴 수사로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고, 지난해 11월 오 씨가 검거됐다. 검거의 주역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의 김응희 경감이다. 김 경감은 이번 사건 종결의 공로를 인정받아 경감으로 특진했고 경북상주경찰서로 발령이 나 여성청소년수사팀을 지휘하고 있다. 김 경감은 18년 전 서울도봉경찰서에서 근무할 때 막내로 이 사건에 투입됐다. 이때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다가 지난해 서울지방청으로 발령이 나 사건파일을 다시 꺼내들었다. 김 경감은 “투입되거나 담당했던 사건 중에 범인을 잡지 못했던 적이 많았지만 이 사건은 특히 잊을 수가 없었다”며 “피해자의 11살짜리 딸이 눈에 아른거릴 정도로 피해자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고 사진과 DNA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수사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경감은 용의자의 당시 나이를 20대라고 추정하고 1965년부터 1975년 사이 출생자 중 강력범죄 전과자 8000여 명을 수사 선상에 올렸다. 이후 CCTV에 포착된 사진과 유사한 외모와 AB형의 혈액형을 가진 125명으로 추렸다. 이 중에 절도와 강도 등의 전과가 있었던 오 씨가 포함됐다. 18년 전에는 오 씨에게 성폭행 전과가 없었기 때문에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었다. 김 경감은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오 씨를 포함한 용의자들을 상대로 잠복근무를 펼쳤다. 용의자 중에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사람도 있어 교도소에 면회를 가기도 했고, 용의자들이 살고 있던 고시원이며 일을 하던 회사까지 쫓아갔다.
오 씨를 체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담배꽁초였다. 김 경감은 동료와 함께 오 씨의 거주지였던 양주 소재의 한 아파트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중 버려진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삼각형 모양의 아파트 구조와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는 장소 등을 감안해 오 씨가 버린 담배꽁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또 김 경감은 “오 씨의 전과와 그동안의 범행수법을 미뤄 봤을 때 지리감(어떤 곳의 지형이나 길 따위의 형편에 대한 느낌)이 있어 이 사건의 피의자라는 감이 왔다”고 밝혔다. 결국 오 씨의 DNA 검사를 해보니 18년 전 피의자의 것과 일치했고, 이렇게 오 씨는 1998년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두 아이의 엄마였던 부녀자를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강간살인 등)로 18년 만에 검거됐다. 오 씨는 검거 당시부터 “전셋집을 구하던 중 우연히 피해자 집을 찾게 됐고, 충동적으로 성폭행한 후 살해했다”고 범행을 시인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다행히도 2010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으로 처벌이 가능했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2013년 사건 종결될 예정이었지만 법 개정이 됐기 때문에 범인의 DNA가 확보된 경우 공소시효가 10년 연장돼 이 사건은 2023년까지 처벌할 수 있게 된 것. A 씨는 범인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다가 지난해 한 경사의 전화를 받았다. ‘범인을 특정한 상황이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전화를 받고도 이를 믿지 못하고 보이스피싱이라 생각해 끊어버렸다. 그러나 기대도 안 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졌다. 형사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 며칠 뒤 범인이 정말 잡혔다. 18년 동안 잊을 수 없었던 흑백사진 속 얼굴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A 씨는 지난 18년 동안 생계를 위해 정신없이 살아왔다. 아이 둘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음식점에서 일을 하다가 부동산 일을 해보기도 했고, 지금은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었다. A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딸 아이가 사춘기를 겪었고 엄마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으로 재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다”며 “아이들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많이 힘들어했을 것인데 이제라도 범인이 잡혀서 다행이다. 범인이 죗값을 다 받아야 한다. 지금껏 공판에 다 참여했지만 오 씨나 오 씨의 가족이 선처를 위해 부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형이라 포기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피의자가 검거된 뒤에야 A 씨의 딸은 검찰청에서 주관한 심리 치료를 받았고 A 씨 가족에게 위로금이 전해지기도 했다. 사고 당시 받을 수 있었던 위로금은 신청 기한이 이미 한참 지나버린 상태였다. A 씨는 오 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A 씨는 “당시 도난당한 금액은 150만 원 정도라서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고통스럽게 보낸 시간을 보상받아야 한다. 선고 이후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것이다”라며 “아이들 엄마가 지금 납골당에 안치돼 있는데 이제 한을 풀고 편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