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로부터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측근이었던 버렐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입만 뻥긋하면 ‘폭탄급’ 발언이 줄줄이 터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검찰과 변호인측 모두 ‘가급적 민감한 부분은 건드리지 말자’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를 본 듯 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 별다른 파문은 일지 않았다.
재판의 초점은 버렐이 다이애나의 유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에 놓여져 있었다. 9년 동안 다이애나의 곁에서 집사 노릇을 했고, 또 다이애나의 사망 당시 직접 수의를 고를 정도로 가까웠던 만큼 상당수가 그녀로부터 직접 받은 ‘선물’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 또는 다이애나로부터 “처분하라”는 말을 듣고 가져오긴 했지만 내키지 않아서 그냥 갖고 있던 물건도 있었으며, 다이애나가 훗날 윌리엄과 해리 왕자에게 건네 주길 바라는 물건을 “잠시 맡아두고 있었던 것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 맨 왼쪽부터 다이애나와 버렐, 버렐이 소장하고 있던 다이 애나의 스카프, 1981년 찰스 부부가 결혼선물로 받은 나무 책상. | ||
또한 경찰에 의해 압수된 물건 중에는 각종 보석과 심지어 책상까지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가 결혼 당시 선물로 받았던 기념품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핸드백, 스카프, 구두와 함께 다이애나의 친필 사인이 담긴 CD 50점, 비디오 테이프, 인디애나 존스의 채찍 등 그 종류도 다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다이애나가 생전에 입었던 1만파운드(약 2천만원)에 달하는 이브닝 드레스 등 각종 의류도 발견되었는데 이에 대한 버렐의 진술이 다소 논란이 됐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 의류들은 다이애나를 대신해서 중고상에 팔기 위해 자신이 임시로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전에 다이애나는 1년에 두 번 20벌 정도의 옷가지를 비밀리에 런던의 부티크에 정기적으로 팔았는데 자신이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던 의류도 모두 당시 훗날 되팔기 위해 갖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는 주장. 다이애나는 이 돈을 여행 경비를 마련하거나 영화를 보는 등 말 그대로 ‘용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왕실에서 받는 용돈도 모자라 옷까지 팔며 사치를 부렸다”고 비난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얼마나 용돈을 넉넉히 주지 않았으면 몰래 옷까지 팔았을까”라고 동정심을 나타내는 등 의견이 엇갈렸다.
그의 집에서 발견된 유품 중에 또 하나 놀랄 만한 것이 있었다. ‘Princess:private’라고 표시되어 있는 한 장의 플로피 디스켓이 바로 그것. 표기해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분히 개인적인 자료가 담겨져 있음에 틀림 없는 이 디스켓이 왜 하필 그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버렐은 “그녀의 측근 중 내가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는 판단하에 나에게 넘겨진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 디스켓에 무엇이 들어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공개된 바가 없어 주위의 호기심만 부추기고 있다.
그의 이런 ‘선물’이라는 주장에 대해 검찰측은 다이애나의 어머니인 프랜시스 샌드 키드와 언니인 사라 맥코쿼달을 증인으로 내세우며 “다이애나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반박했다. 특히 다이애나의 유언 집행인 중의 한 명인 맥코쿼달은 “다이애나의 유언장에는 반드시 그녀의 모든 보석들은 훗날 윌리엄과 해리 왕자의 신부에게 물려주도록 되어 있었다”며 “그 누구도 다이애나의 물건을 사유하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처음 이 문제가 불거져 나왔던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아무도 사라진 다이애나의 유품이 어디에, 또 누구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던 것. 버렐이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것은 지난 2001년 <열쇠 구멍 들여다보기>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신의 집을 공개하는 과정에서였다. 그 프로그램을 보던 몇몇 경찰들이 화면 속에서 눈에 익은 다이애나의 물건들을 발견하고는 ‘뭔가 수상쩍다’는 낌새를 느꼈던 것.
이후 불시에 그의 집을 수색한 경찰들이 집안 구석구석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다이애나의 유품을 발견했으며, 결국 그는 절도범으로 몰려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법정공방의 와중에 지난 1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버렐에게 다이애나의 유품 보관을 허락했다”는 ‘증언’이 알려졌다. 재판부는 기다렸다는 듯 버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사건은 의혹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