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험금 버티기가 자살골 될 줄이야
벼랑 끝에 몰린 김 사장은 결국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겠다며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미 ‘괘씸죄’에 걸린 그가 본인 바람대로 연임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이 연임 발표 9시간 만에 금융당국의 문책을 받으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연합뉴스
지난 2월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과 증권거래소에는 다소 뜬금없는 공시가 하나 올라왔다. 삼성생명이 이사회를 열어 몇 가지 안건을 승인했는데, 김창수 현 삼성생명 사장을 대표이사로 재선임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3월 24일 주주총회에서 승인되면 김 사장은 정식으로 연임한다는 의결이다. 대표이사의 연임 결정이니만큼 가벼운 사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공시는 금융권은 물론 감독당국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자살보험금 지급 문제를 놓고 김 사장의 징계수위를 결정하는 제재심의위원회가 하필 이날 열리기로 예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만약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김 사장에 대한 중징계가 결정되면 그는 연임이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사회를 열어 연임에 성공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린 셈이 됐다.
2014년부터 삼성생명 사장을 맡아온 김 사장의 공식 임기는 지난 1월로 끝났지만 특검 수사 등으로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가 미뤄지면서 대표이사직을 계속 유지해왔다. 하지만 자살보험금 지급에 관해 당국과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그가 물러날지 여부를 사실상 금융감독원이 결정하는 형국이 됐다.
예정대로 금감원은 이날 오후 제재심의위원회를 열었고,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지 않은 삼성·교보·한화생명에 대한 제재안을 의결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제재를 받은 것은 삼성생명과 김창수 사장이다. 금감원은 삼성생명에 대해 영업정지 3개월, 김 사장에 대해 중징계에 해당하는 문책경고를 결정했다.
금감원은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 대해 “약관에 피보험자가 책임 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후 자살할 경우 재해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것으로 기재하였음에도 해당 보험금을 고의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보험금을 청구한 보험수익자에게 재해사망보험금 부지급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살보험금은 2014년부터 논란이 이어져온 사안이다. 당시 생명보험사들은 가입한 지 2년만 지나면 자살을 해도 보험금을 주기로 하는 내용을 담은 재해사망특약을 판매했는데, 실제로 자살하는 사례가 나오자 대부분 생보사는 보험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삼성과 한화, 교보, 이른바 ‘빅3’ 생보사는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금을 주지 않고 버텼고 결국 법정싸움이 벌어졌다.
수년을 끌어온 다툼은 지난해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대법원은 소멸시효 2년이 지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빅3 생보사는 법원 판결에 반하는 보험금을 지급하면 배임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급을 거절했다. 보험금청구 소멸시효 2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지급되지 않은 자살보험금은 삼성생명이 1608억 원으로 가장 많고 교보생명 1134억 원, 한화생명 1050억 원이다.
자살보험금 논란은 금감원이 전격 개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금감원은 ‘잘못된 약관도 고객과 약속이니만큼 미지급 보험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감독권한을 발동해 징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금융감독원이 자살보험금 미지급과 관련해 삼성생명과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에게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 임준선 기자
생보사들은 예상을 넘어서는 금감원의 강경함에 적잖이 놀랐다. 특히 중징계가 내려질 경우 최고경영자(CEO)의 입지까지 흔들릴 수 있는 만큼 보험사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빅3 중 교보생명이 가장 먼저 항복을 외치며 투항했다. 교보는 제재심이 열리던 날 “미지급 자살보험금 전액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교보는 1858건 672억 원에 달하는 자살보험금 미지급분을 전액 지급키로 결정했다. 항복선언의 효과는 적잖았다. 금감원은 3개 사 가운데 교보생명에 가장 가벼운 제재를 내렸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도 주의적 경고를 받아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버티기에 이어 이사회를 통해 역공(?)을 시도한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은 ‘금융검찰’로 불리는 금감원이 가진 막강한 파워를 재확인하며 제대로 체면을 구기게 됐다. 금감원은 김 사장에게 문책경고를 내림으로써 그의 ‘연임선언’을 불과 9시간여 만에 수포로 돌렸다. 금융회사의 임원은 문책경고 이상의 제재를 받으면 금융회사의 임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김창수 사장이 이날 이사회에서 재선임됐다 해도 아직 주총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기 때문에 자동으로 연임하지 못한다. 이날로 퇴진이 결정돼버린 셈이고, 앞으로도 몇 년간 적어도 금융권에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제재심 의결 결과는 통상 금융위원회 부의를 통해 확정되는 것이 관례다. 특히 금융사에 대한 중징계는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한 뒤 금감원장 전결을 받아 격주 간격으로 열리는 금융위 전체회의에서 최종 확정된다. 이번 달 금융위 전체회의는 3월 8일과 22일에 열릴 예정인데, 늦어도 22일 전체회의에서는 이들 생보사에 대한 제재안이 최종 확정될 가능성이 유력하다. 만약 금융위 전체회의가 8일에 열린다면 삼성은 주총 전에 가처분소송 등 법적 대응을 해 볼 시간이 있다. 하지만 22일에 결정되면 불과 이틀 뒤 주총이 열리기 때문에 대응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이보다 더 크고 위험한 변수는 진웅섭 금감원장의 결심이었다. 제재심 의결 결과는 금융위를 거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금감원장 전결로 확정할 수도 있다. 결국 진웅섭 금감원장의 손끝에 김 사장의 생사여탈권이 달렸다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김 사장 쪽은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삼성생명은 휴일인 지난 1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다음 날 곧바로 이사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논란이 된 자살보험금 전액지급을 의결키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돈을 내주고 싶지만 휴일인 데다 이사회라는 절차를 거쳐야 하니 하루만 시간을 달라는 다급한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진웅섭 금감원장, 혹은 금융위가 김 사장의 이러한 태도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 미지수다. 금감원장 전결 결정이 나올지, 제재안 최종 확정이 이뤄질지를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전망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