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잡은 ‘미꾸라지’ 놓쳐…공범엔 사형 구형
# 필리핀 가기 전에 있었던 일
사건의 전말은 지난 2015년 말에 시작됐다. 사망한 세 명을 포함한 한국인 네 명은 2015년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사무실을 얻고, J 법인을 설립한다. 법인을 설립한 목적은 투자자들을 다단계 방식으로 모집해 이들로부터 FX마진 거래에 대한 투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사망한 세 명은 각각 대표이사, 전무, 상무 등의 직위를 달고 재무, 마케팅, 투자자 관리 등의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투자자들을 상대로 “외환거래 일종인 FX마진 거래를 통해 투자원금은 보장하면서 투자금에 대해 월 2%의 수익을 지급하겠다”며 “1000만 원 이상부터는 액수에 따라 수익률이 늘어난다”고 홍보했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1년 동안 263명의 피해자로부터 453회에 걸쳐 138억 4000만 원을 편취했다. 사망한 세 명과 같이 일했던 동업자 김 아무개 씨는 지난 1월 유사수신 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가 인정돼 1년 6월의 징역이 선고됐다.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의 범행은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해 단기간에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해 그 폐해가 심각한 범죄로 죄질이 불량하다”며 “피해자의 수 및 피해액의 규모가 매우 크고 조직적이며, 피고인은 투자자 유치 및 교육을 주로 담당해 피고인의 설명을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해 투자를 결심한 피해자들도 상당수에 이르는 등 이 사건 범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피고인이 취득한 수익이 적지 않으며 대부분 피해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초범이며 피고인이 범행 이후 일부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점, 피고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 등을 반영해 징역 1년 6월을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한 명은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나머지 세 명은 사망해 수사가 이미 종결됐다. 피해자들의 수익은 여전히 보전되지 않은 상태다.
# 피해자들과는 어떤 관계?
세 명의 한국인 남녀는 지난해 10월 11일 필리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들은 사탕수수밭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유사수신 행위를 중단한 지 세 달 만이었다. 이후 피해자들의 몸에 묶여 있던 테이프에서 박 아무개 씨(38)의 지문이 나오면서 박 씨가 검거됐고, 박 씨의 조사과정에서 김 씨가 공범 혐의를 받았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귀국한 김 씨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사건 당시 CCTV와 주변인 탐문으로 다시 체포됐다.
박 씨가 필리핀에서 지난해 11월 검거되던 당시 사진.
체포 직후 김 씨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옷에서 화약 잔류반응 등이 나오자 심리적 자책감으로 인해 자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씨는 ‘내가 사람 하나를 처리하려 하는데 1억 원을 줄 테니 아무도 모르게 도와 달라’는 박 씨의 제안을 받고 필리핀으로 출국했다. 이들은 피해자들과 함께 지내며 범행 장소를 사전 답사한 뒤 피해자들을 포장용 테이프로 묶어 사탕수수밭으로 끌고 갔다. 박 씨는 도착하자마자 총으로 피해자들의 머리를 쏴 살해했다. 박 씨는 필리핀에 머물렀던 반면 김 씨는 혼자서 먼저 귀국했기 때문에 주범인 박 씨보다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씨 측 변호인단에 따르면 김 씨는 박 씨를 몇 년 전 지인 소개로 알게 됐다. 박 씨는 돈을 잘 버는 사업가 행세를 하며 자신에게 투자를 하면 투자수익을 많이 낼 수 있다며 김 씨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당시 모아 놓은 돈이 있어 투자할 곳을 찾던 김 씨는 자연스럽게 박 씨와 친해지며 수천만 원을 몇 년 전에 투자했지만 수익을 올리기는커녕이 많은 돈을 잃었다. 이후 김 씨는 일용 노동을 하면서도 이자압박에 시달렸다. 이때 박 씨는 김 씨에게 용돈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했다. 처리할 일이 있는데 도와주면 소정의 돈을 주겠다는 것. 당시 김 씨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또 친구들에게 ‘노느니 소일거리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며 필리핀에 간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청부살인 의혹 제기돼
이때까지 피해자들과 대면한 적도 없는 김 씨는 금전적 어려움 때문에 박 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지난해 10월초 필리핀으로 출국한다. 김 씨는 박 씨가 부탁하는 일을 하기 전까지 피해자들을 전혀 몰랐던 데 반해 박 씨는 피해자들을 직접 필리핀으로 오게 한 장본인이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박 씨는 피해자들에게 필리핀 현지 도피 생활을 지원하며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카지노 투자를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피해자들이 소지한 7억 원 상당의 자금을 빼앗기 위해 살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청부살인 의혹도 불거졌지만 주범 박 씨가 체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박 씨가 누군가의 청탁을 받아 처음부터 피해자들에게 접근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돈을 노린 직접 살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오히려 박 씨가 김 씨에게 살인을 청부했다는 이야기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김 씨 변호인 단에 따르면 박 씨는 당초 김 씨에게 살인을 지시했다. 김 씨의 변호를 맡은 조찬형 변호사는 “박 씨의 제안으로 필리핀에 건너 간 김 씨는 일주일 동안 한국인 세 명을 빨리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다. 박 씨가 소음기 달린 총을 사다주기도 했다”며 “김 씨는 알겠다고는 했지만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자 박 씨가 필리핀 현지인을 고용하겠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리핀 현지인에게 살인을 청탁하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교민들은 “예전에는 현지인들에게 살인청부를 했을지 몰라도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며 “현지인들이 살인청부를 약점으로 삼고 오히려 해코지를 할 수도 있고, 경찰에 신고해 보상금을 받으려고 할 수도 있다”고 입을 모았다.
조 변호사에 따르면 김 씨는 필리핀에 간 후 박 씨로부터 여러 번 ‘피해자들을 죽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사건 당일 박 씨가 새벽에 귀가한 후 총을 챙길 때 눈에서 살기를 느꼈고, 김 씨는 ‘따르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갑작스럽게 얼떨결에 범행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며 “박 씨는 피해자들을 결박하고 제압하는 수준으로 협조했고, 범행 현장에 도착해서 박 씨가 총을 쏠 때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 간의 금전거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고 현장지시에 따른 정도가 다였다. 범행 이후에도 박 씨에게 도와준 대가로 받은 돈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 조사 결과 범행 이후 두 사람은 인근에 사체를 유기했고 거주지에 있던 소형 금고와 예치된 투자금을 모두 인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엇갈린 이들의 운명은?
주범으로 의심받는 박 씨.
김 씨를 변호하는 배일형 변호사는 “검찰 측에서는 재산과 관련된 강도살인이고 피해자가 세 명인 데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사건이라 김 씨에게 중하게 구형했다”며 “재판부가 판단을 할 일이지만 본인이 계획하고 주도한 것도 아니고, 주범이 국내에 없는 상태에서 김 씨만이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그림이라 구형대로 선고가 난다면 억울할 일이다. 김 씨는 현장에 있었지만 가담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 역시 “피고인이 살인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살인을 방조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분명히 공범이 되는 게 맞다”면서도 “박 씨가 총을 들고 찾아와서 얼떨결에 휩쓸릴 부분이 있으며, 피해자들의 재산을 강취할 의사는 절대 없었다”고 말했다.
검찰은 김 씨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31일 선고 공판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가 변론재개를 결정해 김 씨에게는 마지막 변론 기회가 생겼다. 조 변호사는 “재판부가 변론 재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보통 재판진행과정이 미진했다고 판단했거나 단순하게 무언가를 확인한 필요가 있을 때 재개된다”면서 “변론재개가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