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동 전 총리가 7일 민주당 한광옥 최고위원 계보인 최명헌 의원 등과 만나 민주당 대선 후보 재경선 의지를 표명한 것은 그 도화선이 됐다. 이 전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상 지지율이 노 후보에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낮지만 그의 등장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심각하다.
노 후보체제를 본격적으로 흔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간 노 후보측은 반노 및 비노그룹의 재경선 요구에 대해 “정몽준 의원이 들어오지 않는데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반박해왔지만 이제는 형식상 그런 주장이 불가능해졌다. 이 전 총리가 무대에 오름으로써 반노와 비노그룹은 활동을 개시할 정치공간을 확보하게 된셈이다.
더욱이 이 전 총리를 지원하는 민주당 내 세력이 만만찮다. 노 후보 지지그룹에 비해 현역의원 숫자에서 우위다. 1백13명의 민주당 의원 중 친노무현계 및 한화갑 대표계가 40여 명 정도라면 한 최고위원과 정균환 원내총무가 중심인 비노무현계, 이인제 의원이 주축인 반노그룹 등은 50여 명 선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정 총무가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면 비노그룹의 세불리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게 당내의 일반적 관측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 총무는 집권 이후 나름대로 사람관리를 해왔다.
그가 움직이면 상황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정 총무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누가 되든 다시 판을 짜서 새로 후보를 뽑아야 경쟁력이 생긴다”며 “이한동 전 총리든 정몽준 의원이든 누구든 미래지향적이라면 함께 해야 한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해 한 행사에 참석한 이한동 전 총리(왼쪽)와 한광옥 최고위원. | ||
당시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노 후보는 영남표도 못끌어오면서 소위 메이저 언론들과의 관계도 나쁘고 우리사회의 보수층의 거부감이 심하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보수층과의 관계도 좋을 뿐만 아니라 소위 두 개의 메이저 신문사의 사주와 사돈지간이거나 경복 고등학교 선후배간이다.
또 호남색을 탈피한 중부권 대선후보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김 대통령이 노 후보가 퇴임 이후를 보장해주기 힘들다고 판단, 이 전 총리를 선호하고 있다는 관측도 무성했었다. 따라서 ‘반노 쿠데타’의 주도권은 일단 한 최고위원 및 정 총무가 이끄는 비노그룹쪽에서 잡아가고 있다.
이들은 10일 40여 명의 의원들과 모임을 갖고 세과시를 하면서 노 후보측에 이 전 총리와의 재경선을 강력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이달 말쯤에 80여 명의 의원들을 모아 세몰이를 한다는 계획이다. 10일 귀국하는 이인제 의원측도 가세할 가능성이 유력하다.
이 의원측 내에서도 강경파에 속하는 송석찬 의원은 노 후보 사퇴 서명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대세를 형성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수해로 인해 여론이 뒤숭숭한 시점에 노 후보 사퇴 서명운동을 벌이는 게 무책임한 정쟁으로 비쳐질 것이라는 게 이 의원측 판단이다.
따라서 이 의원은 귀국 일성으로 “노 후보는 재경선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노 후보를 제외한 사람이라면 정몽준 박근혜 의원, 이 전 총리 등 누구라도 대통령 후보로 모시고 뛰겠다”는 게 이 의원의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노 후보측은 비노그룹 등이 몰아붙이는 이 전 총리와의 경선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니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다. 정동채 후보 비서실장은 “지지율이 낮은 이 전 총리와의 경선은 외연 확대 의미나 실효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노 후보는 5일 김상현 정대철 김근태 정동영 의원, 김원기 고문 등과의 친노 8인 모임에서 이 전 총리와의 경선 문제가 거론되자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노파가 자신을 흔들기 위해 경쟁력이나 참신성이 전혀 없는 인사를 카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게 노 후보의 정서라는 얘기다. 그러나 비노 및 반노그룹의 명분 중 노 후보측이 거부하기 힘든 대목이 있다. 6월 지방선거와 8•8재보선에서 영남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득표력을 상실한 노 후보는 다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 같은 공격 논리를 무력화하려면 이 전 총리가 재경선 도전을 선언할 경우 수용, 재경선에서 승리하는 것 이외에 도리가 없다. 비노그룹 등이 노리는 정치적 목표는 복잡하다. 대선승리가 ‘반노 쿠데타’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민주당 내지는 통합 신당의 당권 장악이 숨겨진 목표라는 분석도 적지않다. 한광옥 최고위원, 정균환 총무 등이 소위 동교동계 구주류 출신이고 노 후보를 지원하는 한화갑 대표가 동교동계 신주류라는 점에 주목, 동교동계 신•구주류간의 전쟁이 재개됐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구주류쪽은 수도권, 경기, 충청, 강원도 등을 기반으로 한 ‘중부권 정당’을, 신주류측은 노 후보측과 연합해 ‘개혁정당’을 각각 추진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 대표와 지난 8•8재보선을 통해 원내 복귀에 성공한 김상현 의원간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점도 또 다른 변수다. 김 의원이 인터넷 정치 사이트인 e윈컴과의 인터뷰에서 ‘한 대표 2선 후퇴’를 사실상 요구하자 한 대표는 6일 “김 의원이 과거에 왜 공천을 못받았는지 알겠다”고 쏘아붙였다.
김 의원이 노 후보 캠프 내에서 발언권이 강해질수록 한 대표는 노 후보쪽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인제 의원측도 탈당하지 않고 끝까지 상황을 지켜본다는 전략. 만약 노 후보측이 신당창당 주도권을 유지하면 그 신당에 입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3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의원은 경선불복에 탈당 전문가라는 식의 비난을 최소화하면서 시간을 벌 생각인 듯싶다. 이달 내내 요동칠 친노와 비노 및 반노간의 세력대결의 승패는 일차적으로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민주당 의원들의 진짜 관심은 대선승리보다 2004년에 실시될 17대 총선에서의 ‘살아남기’에 쏠려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한 중진의원은 “솔직히 상당수 의원들은 위기감에 휩쓸려있다. 거의 모든 지역구에서 민주당을 외면하고 있다. 결국 어떤 신당이 차기 총선에서 공천과 당선을 보장해주느냐가 의원들의 관심사다”고 털어놨다.
이와 관련, 노 후보가 초•재선 및 개혁성향의 의원들에게 유리한 카드인 반면 3선 이상 또는 보수성향 의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차기 대선의 승패를 떠나 노 후보측이 당권을 장악하는 정당에서 그들은 발붙일 곳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민주당 내 구도가 비노 및 반노그룹의 반노 쿠데타가 힘을 받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비노 및 반노그룹이 노 후보를 사퇴시키고 이 전 총리를 후보로 내세우는데 성공할 경우 대선 승리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질 공산이 높다. 하지만 대선 이후 제1야당의 위치는 차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반노 쿠데타의 본질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김병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