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악재 뚫을 길은 우승밖에 없었다”
2015년 전 전 감독을 따라 KGC 수석 코치를 맡게 된 김 감독은 전 전 감독이 승부조작 스캔들(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에 휘말려 감독 자리를 내놓자 그 공백을 메우며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다. 2016년 1월, 정식 감독으로 임명된 후 2년 만에 팀을 통합 챔피언에 오르게 한 그는 우승 직후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을 전하며 “현재 농구계에 계시지 않지만 좋은 분께 혹독한 수업을 받았다. 그때 잘 배워 지금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인터뷰를 해 화제를 모았다. 그 ‘좋은 분’은 전창진 전 감독이었다.
현역 시절 ‘터보 가드’로 이름을 날린 김승기 감독은 선수, 코치에 이어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한 KBL 최초의 인물로 등극했다. 우승 턱을 내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다고 말하는 김 감독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이제 좀 마음의 안정을 찾았나. 우승 직후 뜨거운 눈물을 흘리더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 같다.
“(우승이)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우승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실감이 안 나서 그런지 여전히 긴장 상태이다. 올 시즌 잘 버텨준 선수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핵심 전력인 키퍼 사익스가 부상을 당하며 우승이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선수들이 더 똘똘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챔피언결정전 6차전까지 오면서 어느 경기가 가장 부담이 됐었나.
“1차전에서 키퍼 사익스가 무릎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차전 승리 후 2차전에선 뛰지 못했고, 경기는 패했다. 그런데 3차전에선 사익스가 벤치에서 뛰는 것 못지않게 열심히 응원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3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것도 역전승으로 말이다. 3차전에서 패했더라면 이후 힘든 경기들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4차전은 이길 수 있는 게임을 헌납했고, 5차전은 편하게 승리를 이끌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안양KGC 인삼공사를 통합 챔피언으로 이끈 김승기 감독은 스승인 전창진 전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밝혔다.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을 거라고 예상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7차전까지 가면 실력보다는 운이 작용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6차전에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데 삼성이 시작부터 거세게 밀고 들어오더라. 선수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2쿼터도 동점, 3쿼터도 동점으로 끝냈다. 4쿼터에선 8점차로 밀리며 패색이 짙었는데 그걸 우리 선수들이 뒤집더라.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밀고 당기는 접전을 펼치다가 이정현의 위닝슛으로 경기가 마무리됐는데 8점차로 벌어진 상황에서 삼성 라틀리프의 슛이 성공해 10점차가 됐다면 우승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 슛이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우리 선수들이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본다. 내가 봐도 6차전은 진짜 명승부였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진땀을 흘렸지만 보는 사람들은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시소게임을 벌였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여운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우승 상황이 작년 6강 플레이오프 때랑 매우 비슷했다. 상대팀도 삼성이었다. 마지막 장면도 이정현의 슛으로 승리가 확정됐었다. 정말 희한한 인연이다.”
―사실 챔피언결정전이 진행되는 동안 농구 외적인 문제들로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특히 2차전에서 벌어진 이정현과 삼성 이관희의 충돌은 결과보다 과정으로 인해 이정현이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정말 힘들었다. 선수들도 나도 압박감을 많이 느꼈다. 하루는 선수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수들에게 우리가 왜 우승을 꼭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렇게 욕을 먹고 우승 못하면 그 욕이 진짜처럼 와 닿겠지만 비난 속에서도 우승을 거머쥔다면 우리는 충분히 보상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난 약이 올라서라도 꼭 우승하고 싶다고, 너희들은 약 오르지 않느냐는 얘기도 덧붙였다. 우리는 절대 비난 받을 정도의 나쁜 짓을 한 게 아닌데 여론이 자꾸 나쁜 방향으로 몰아가니까 이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우승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수들도 내 말에 전적으로 수긍했다. 정규리그 우승 후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면서 행여 선수들이 풀어질까봐 주의 깊게 살폈는데 우리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오히려 팀워크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정현의 플라핑(파울을 유도하는 행위)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정현이 공을 잡을 때마다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 일로 이정현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삼성 이관희가 이정현을 밀치는 행위는 잘못한 일이지만 그 전에 이정현 정도의 선수라면 상대의 압박 수비에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력이 뛰어나고, 연봉이 높은 선수들은 어느 경기에서도 그런 반응을 접하기 마련이다. 그걸 잘 이겨내야지만 더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 내가 이관희였어도 이정현을 상대할 때 그렇게 수비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정현을 묶어두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현이도 이번 일로 인생 공부 많이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4월 20일 서울 강남구 케이비엘 센터에서 열린 2016-2017 KCC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미디어데이 행사. KGC 김승기 감독(왼쪽)이 생각에 잠겨있다. 고성준 기자
―시즌 중에 키퍼 사익스의 교체 논란이 불거졌었다.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초보 감독의 단점이다. 코치 경험이 많아도 감독을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조급한 마음에 실수를 저질렀다. 3라운드 이상은 보고 교체 여부를 결정했어야 했는데 귀가 얇아서 판단력을 잃었다가 중심을 잘 잡지 못해 벌어진 일이니 이해해달라고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당시 사익스를 교체하려 했던 건 우리가 유독 삼성, 동부 등 언더사이즈 빅맨(프로농구는 2명의 외국인 선수 중 1명은 장신을, 또 다른 한 명은 193cm 이하의 단신을 둘 수 있다. ‘단신 테크니션’의 활약 속에 다득점 경기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178cm의 키퍼 사익스는 언더사이즈 빅맨이 아닌 ‘단신 기술자’였다)이 있는 팀에게 약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승을 위해선 작은 신장의 사익스 대신 언더사이즈 빅맨이 필요했기 때문에 교체를 고민했던 건데 선수들이 사익스를 원해 끝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사익스한테는 인간적으로 미안하다는 얘기를 전했다.”
키퍼 사익스는 2016-2017 KCC 프로농구 6라운드 MVP에 선정되며 화려한 백조로 부활했다. 사익스의 맹활약 덕분에 KGC는 6라운드 전승을 이뤘고, 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난 사익스는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김승기 감독은 내년 시즌 키퍼 사익스는 물론 데이비드 사이먼과의 재계약을 희망하고 있다.
―우승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좋은 분’을 언급했다. 미리 준비했던 우승 소감이었나.
“솔직한 감정이었다. 우승하면 당당히 전창진 감독님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내가 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건 그분한테 잘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김승기가 있었을까 싶다. 이전 시즌 앞두고 가진 미디어데이에서 내 몸에는 그분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감독님 밑에서 코치 생활하며 많은 걸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힘들 때마다 감독님 생각을 많이 했다. 나를 이끌어주셨던 그 마음 잊지 않고 살 것이다.”
전창진 전 감독과 김승기 감독은 10년의 시간 동안 바늘과 실처럼 움직였다. 전 전 감독이 불미스런 일로 팀을 떠날 때 김 감독도 사표를 쓰려 했었다. ‘모시던’ 감독의 불행으로 행운을 잡은 것처럼 말하는 농구인들로 인해 김 감독은 꽤 상처를 받았다. 당시 그를 잡아준 사람은 선수들이었다. 선수들이 김 감독을 믿고 따라주면서 팀워크를 다졌고, 김 감독도 선수들만 보고 간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김 감독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선수 말년에 무릎 부상으로 뛸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연봉이 깎일까봐 부상을 감추고 뛰기도 했었다. 은퇴 후에는 주식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10억 원가량의 빚을 떠안았다. 한때 아내와 이혼 위기까지 갔지만 자신을 참고 기다려준 아내의 인내심 덕분에 두 아들과 잘 버티고 살았다고 말한다. 김 감독의 두 아들은 아빠의 유전자를 닮아 모두 농구 선수로 활약 중이다. 실력도 매우 뛰어난 편이라고. 김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가족에 대한 절절함을 드러냈다.
“정규시즌 이후 시상식에서 지도자상을 받았는데 눈물이 날까봐 아내와 부모님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시즌 마치고 시상식에서 상이라도 하나 받는다면 이번엔 꼭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눈물을 꾹 참고 말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