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등장했지만 실화 색채 빼는 과정 삭제…1000만 고지 영화 중 유일하게 TV방영 안 돼
과연 이 정부 출범의 트리거는 무엇이었을까? 적잖은 문화계 관계자는 영화 <변호인>을 그 주인공으로 꼽는다. 지난 2013년 개봉돼 1137만 관객을 모은 이 영화의 원래 시나리오에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겼던 사실이 최근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변호인>을 집필한 윤현호 시나리오 작가는 지난 13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이 참 많이 다르다”며 “뒤늦게 밝힙니다만 <변호인> 시나리오에는 문재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주요 캐릭터는 아니었고 에필로그 직전에 잠깐 나오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윤 작가가 공개한 시나리오는 주인공 ‘(노)무현’과 ‘(문)재인’이 처음 만나는 과정과 무현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인 송우석이 아니라, 무현과 재인이라는 실명을 직접 거론했다는 것이다.
재인은 “처음 뵙겠습니다. 문재인이라고 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무현은 “아, 재인 씨? 말씀 많이 들었어예. 저희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면서요”라고 화답한다.
이어 재인은 “뽑아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더”라며 말하고, 무현은 “여가 인권 전문이긴 한데…. 정작 변호사들 인권은 척박합니더. 일만 많고 돈 안 되는 수임뿐이지예. 괘안습니까?”라고 되묻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극중 모델로 해 ‘부림 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스틸컷.
재인이 사무실을 떠난 후 무현은 “이번 연수원 차석이라면서요? 검사 판사 됐으면 엘리트 코스 차근차근 밟았을 텐데 이런 데는 뭐하러 온답니까”라고 물었고 사무장은 “감옥에서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단다.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을 못 받아 변호사로 방향을 틀었다 아이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하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기어코 노변과 일하고 싶단다”라며 “딱 보면 모르겠나. 노변이랑 같은 과 아이가”라고 답한다.
오랜 지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두 사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같은 건물에서 함께 일한 두 사람이 시간 간격을 두고 나란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것은 이례적이다. 윤 작가는 “시나리오 작업 당시 문재인 변호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그리는 데 빼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공들여 적어 넣었던 기억이 난다”며 “이후 실화 색채를 빼는 과정에서 삭제되었던 거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불과 1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개봉된 <변호인>은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 실망을 느낀 이들 사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억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이는 다시보기 열풍으로 이어졌고,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관람한 후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박근혜 정권에는 전 정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변호인>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결국 이 영화가 개봉된 직후 <변호인>을 투자 배급했던 NEW는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박근혜 정권은 한류를 비롯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와중에 <변호인> 외에도 역시 노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들고,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관람한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이 도마에 올랐다. 당시 정권에는 부담으로 작용했던 영화들이 결과적으로 국민의 정서를 건드려 문재인 정권이 등장하는 데 적잖은 힘을 보탰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변호인>이 전 정권의 미움을 받았다는 것은 또 다른 정황에서도 드러난다. 역대 1000만 고지를 밟은 영화 중 TV에서 방송되는 않은 영화는 <변호인>이 유일하다. 더 늦게 개봉된 <명량>, <국제시장> 등은 모두 TV 영화로 편성됐지만 <변호인>은 예외다. 지난 3월에는 국정 농단 사태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JTBC가 <변호인>의 TV 방송권을 구입한 것이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변호인>이 TV에서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시대가 바뀌었다는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라며 “<변호인>이 물심양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25일에는 영화 <노무현입니다>가 개봉된다. 지난 2002년 노 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을 치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인 <노무현입니다>는 그의 주변 인물 39명의 인터뷰로 구성된다. 당연히 문재인 대통령도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이창재 감독은 16일 열린 <노무현입니다>의 언론시사회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말씀하는 방식이 건조하다”며 “(문 대통령은) 미디어를 잘 모른다. 당신에 대해 물어봤는데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로 빠지더라.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만 극도로 서술적인 설명을 계속했다. 미디어의 입장에서는 ‘답이 없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영화 속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어 내려가며 “제가 이 분의 글 쓰는 스타일은 아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간결하게 쓰지 않는다. 머릿속에 늘 유서를 생각하고 계신데 우리는 그를 아주 외롭게 두었다. 이게 유서를 볼 때마다 느끼는 아픔”이라고 애석함을 표하기도 했다.
10일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고 23일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8주기다. 그리고 25일에는 그를 추억하는 <노무현입니다>가 개봉한다.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현 대통령은 여러모로 영화 같은 삶을 공유했고 영화를 사랑하는, 그리고 영화가 사랑한 대통령들이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