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잡는 척하더니 그럼 그렇지…’
지난 9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출구조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임준선 기자
홍 지사와 친박계 전쟁은 새삼스럽지 않다. 1차 전쟁은 2011년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이 홍준표 대표 체제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나라당은 재보궐선거 참패와 선관위 디도스 공격 연루 의혹으로 해체설까지 나오면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자 친박계는 홍 전 지사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결국 홍 전 지사도 대표 취임 5개월 만에 물러났고, 한나라당은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로 꾸려졌다. 홍 전 지사는 직을 내려놓으면서 “당을 재창당 수준으로 정리한 후 사퇴하려는 제 뜻도 기득권 지키기로 매도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면서 “더 이상 당내 계파 투쟁, 권력 투쟁은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대표직 사퇴를 계파 투쟁에 따른 희생으로 규정한 것이다.
홍 전 지사의 해묵은 한은 이번 대선 기간에서도 터져 나왔다. 홍 전 지사는 박 전 대통령 구속 영장 실질 심사 하루 전이었던 3월 29일 “친박 패권주의가 빚은 참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몇 안 되는 양박들(양아치 친박)과 폐쇄적인 체제로 국정 운영을 하다 보니 판단이 흐려지고 허접한 여자에 기댄 결과가 오늘의 참사를 가져왔다고 본다”며 친박계를 공격했다. 또 대선 유세기간 초반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춘향인 줄 알고 뽑았는데 향단이였다”라고도 했다.
선거를 치르면서 홍 전 지사 스탠스는 바뀌었다. “탄핵은 잘못됐다”라는 등의 발언으로 친박계와 손을 잡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이는 보수 유권자를 의식한 행보로 받아들여졌다. 친박계 의원들 역시 홍 전 지사 유세장에 지원사격을 나서며 일시적인 화해 모드로 돌입했다. 서로 속내는 달랐지만 대선이라는 빅 이벤트 앞에 잠시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홍 전 지사는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잠재해 있던 홍 전 지사와 친박계 간 갈등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권을 누가 잡을지를 놓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홍 전 지사는 대선 패배가 확실해진 직후 “한국당을 복원한 데 만족하겠다”고 했다. 이 발언은 홍 전 지사가 한국당 지분을 강조하면서 차기 당권에 도전할 것이란 관측으로 이어졌다.
사실 대선 기간 내내 여의도에선 홍 전 지사의 당 대표 출마설이 끊이질 않았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차일을 도모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선거 막판 홍 전 지사가 바른정당 복당파를 허용하고 친박계 징계 해제를 결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된다. 당내 지지 기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홍 전 지사가 당내 우군을 늘리려는 것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원내에선 윤한홍 의원 정도가 유일하게 친홍계로 꼽힌다.
일단 당내 비주류, 상당수 초선 의원들은 홍준표 대안론에 기대는 모습이다. 차재원 부산카톨릭대 교수는 “전당대회는 여론 조사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홍 전 지사 입장에선 당 대표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볼 것이다. 특히 ‘나는 바다와 같은 포용심을 갖고 있는데 친박계가 옹졸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겨 자신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친박 진영에선 달갑지 않은 기류가 역력하다. 정우택 한국당 원내대표 겸 당대표 대행은 5월 11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홍 전 지사가) 당권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보고 있다. 저한테 이번에 자기가 만약 당선이 안 되면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며 “또 지금 막 대선에서 떨어졌는데 또 출마해 당권 도전을 하겠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홍 전 지사는 SNS를 통해 “당이 비정상적인 비대위 체제로 파행 운영된 지 6개월이나 됐다. 이제 정상화돼야 하는데 구 보수주의 잔재들이 모여 자기들 세력 연장을 위해 집단지도체제로 회귀하는 당헌 개정을 또 모의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들 주문대로 허수아비 당대표 하나 앉혀놓고 계속 친박 계파 정치하겠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다음이 하이라이트다.
홍 전 지사는 “박근혜 팔아 국회의원 하다가 박근혜 탄핵 때는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었고 박근혜 감옥 가고 난 뒤 슬금슬금 기어 나와 당권이나 차지해보려고 설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참 가증스럽다”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를 두고 한국당에선 난타전이 벌어졌다. 친박 중진 홍문종 의원은 중진의원 간담회에서 “(홍 전 지사가) 낮술 드셨냐”며 “홍 전 지사가 상왕이냐. 자기가 뭐라고 얘기하면 그게 법이고 지침이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친박계 유기준 의원도 “외국에서 있으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페이스북 통해서 계속해서 대선 이후 당내 상황에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모습 아니다”라고 말했다.
홍 전 지사가 친박계를 향해 바퀴벌레라는 표현을 쓴 것은 최근 친박계가 당대표 권한을 축소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친박계는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하는 기존의 방안 대신 당대표 출마 낙선자들이 최고위원으로 발탁되는 안을 선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경우 전자보다 대표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마땅한 당대표 주자가 없는 친박계로선 홍 전 지사를 염두에 둔 ‘궁여지책’인 셈이다. 한 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친박계에선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딜레마”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집안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국당에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차재원 교수는 “지금은 밑바닥부터 반성을 해야 할 시기다. 당을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지 또 당장 왜 졌는지를 냉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인데 그러한 노력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기존의 포맷에서 기존의 인물 갖고 하면 안 된다. 새로운 발상과 인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