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권 무료변론 자청…사무실 어려워도 직원들엔 파격대우”
장원덕 전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가방은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시절 국제시장에서 구매해 청와대에 들어가기까지 14년간 사용한 가방이다.
“아시다시피 그리 미남은 아니잖아요. 시골의 농사꾼처럼 보이는데, 이마에 주름도 굵직하면서. 판사 생활을 하시다가 78년도 5월에 부산에 내려와 변호사 개업을 하시며 함께하게 됐습니다. 법전을 내놓으며 ‘읽어보시오’ 하시더니 ‘됐습니다, 더 말할 필요 없습니다. 같이 합시다’ 그러셨어요. 그때부터 변호사님 모시고 같이 일하게 됐죠.”
장원덕 전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에서 운영하던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배우 오달수가 연기한 캐릭터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그는 30년의 긴 세월 동안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을 보필하며 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 ‘노변’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는 그는 최근 영화의 흥행으로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 자신의 몸가짐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됐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단어를 고르며 신중히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에서 두 대통령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장 전 사무국장은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서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부림 사건’이라고 기억한다. 영화 <변호인> 내용 그대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부림 사건을 맡아 면회를 갔다 오시더니 눈빛이 바뀌셨더라. 평소 사무실에 오실 때 보면 계단을 뛰어 올라오시고 휘파람도 부시고 하시는 성격인데, 그날 피고인 접견을 다녀오시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변호사실로 조용히 들어가 나오지를 않으셨다. 원래 성격이 털털하고 개방적이셔서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농담도 던지는 분이신데 그러지 않으셔서 이상했다. 나중에 들어가 보니 책상에 엎드려 계시더라. 그러시더니 ‘이제 내가 눈을 떴다. 우리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앞으로 일반사건은 가능하면 맡지 말고 앞으로 부림 사건을 비롯해서 노동자를 위해 전념할 테니까 장 사무장도 그리 생각하라’ 하시더라.”
평소 눈물도 많고 정도 많았던 노 전 대통령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 사건 이후 거리로 나가 인권변호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체면이나 권위를 중시하던 때라 변호사가 데모 현장에 가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변호사들에게 ‘고등학교밖에 안 나와서 저렇게 한다’ ‘역시 상고 출신은 다르다’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밤낮없이 변론을 준비했다.
“사무실 밑에 항상 정보과 형사들이 깔려있었다. 사복경찰들이 매일 우리 사무실로 출근해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일반 소송은 오지도 못했다. 우리 사무실에는 시국사건, 데모한 학생들이나 부모님들, 노동자들 그런 분들이 오셨다. 남들은 맡지 않는 사건, 돈이 되지 않는 사건을 노무현, 문재인 두 변호사가 맡으셨다. 우리 직원들이 법원에 사무과 일을 하러 들어가면 비웃듯이 했다. 그냥 일반사건이나 맡으면 되는데 뭐 그런 사건을 맡느냐는 거였다. 그래도 묵묵하게 일했다. 상관이 정의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아래 직원들도 따라갔다. 모두 두 변호사님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함께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의에 불타는 사나이’였다고 보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문재인 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과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에서 네 번째), 장원덕 전 사무국장(오른쪽 끝)이 청와대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진제공 = 장원덕 전 사무국장
노동문제나 인권문제를 맡으며 무료 변론을 했기에 직원들 봉급을 겨우 챙겨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주변 사무실에서는 ‘신의 직장’ 소리를 들었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아무리 실수를 해도 혼내는 법이 한번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 하는 말씀이 다였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직원이 실수하면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을 냈다. 그러고 나서는 술도 잘 못 하시는 분이 ‘오늘 저녁에 소주나 한잔 하자’며 가서 마음을 달래 주셨다. 노 전 대통령은 권위를 내려놓고 항상 직원들과 함께하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그러나 검사·판사는 밥집에서 만나도 ‘내가 왜 사야 되는데’ 하시며 대접 한 번 하지 않았다. 강한 자에게는 강했고, 약한 사람에게는 더 약했다.”
장 전 사무국장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 두 사람은 상반된 성향으로 ‘상호보완적 존재’였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보다 여섯 살 아래인 문 대통령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2002년 대선 선거운동 중 “나는 대통령감이 된다.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 후보 아니겠습니까”라고 연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곁에서 지켜봐 온 그는 ‘문 대통령’ 이야기만 들어도 노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고 했다. 문변이 문 대통령이 된 지금, TV에서 ‘문재인 대통령’ 소리만 들려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그는 마지막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이제 편하게 영면하십시오. 당신이 못다 이룬 꿈을 문 대통령께서 꼭 이루시어 국정농단으로 국민의 가슴에 피멍이 들어있는 아픔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부산=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노&문 법률사무소 지금은? 노무현 별명 딴 ‘바보면가’ 전국서 발길 잇따라 부산 서구 부민동 동아대 부민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건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했던 곳이다. <일요신문>은 장 전 사무국장의 기억을 따라 옛 부산지방법원 인근인 부산 서구 부민동 동아대 부민캠퍼스 후문에 위치한 한 건물을 찾았다. 해당 건물은 과거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했던 곳으로, 문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과거 합동법률사무소의 사진이 온라인에 게재돼 ‘대통령 2명 배출한 건물’로 유명해졌다. 과거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문 대통령과 이정이 할머니가 함께 대출을 받아 건물을 매입했다.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을 도우며 ‘어머니’로 불렸던 이정이 할머니는 ‘노동자 자식들, 민주화를 위해 일하신다는데 노동일도 모르면서 노동자를 위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복국집을 운영하게 됐다. 이정이 할머니는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회고하며 그리움을 전했다. 그는 “인권운동을 돕다보니 인권변호사인 노 전 대통령과 만나게 됐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다들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니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도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이어 이 할머니는 ‘인간 노무현’을 이렇게 추억했다. “노 전 대통령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힘든 시기에 노동자나 인권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나서 인권변호사로서의 첫발을 디뎌줬다. 성직자도 아닌데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돈도 안 받고 사람들을 도왔다.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를 좋아하던 이들이 노 전 대통령이 돈이나 권력이 있어 좋아했겠나. 그 사람이 정의와 양심을 지켰기에 사람들이 좋아했던 거다. 생전에 상록수 노래를 좋아하셨는데, 상록수 같은 분이었다”고 전했다. <일요신문>이 방문한 건물은 현재 대학생을 위한 원룸으로 쓰이고 있었다. 1층에는 남경복국 대신 ‘바보면가’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 1년 전부터 식당을 운영해 온 오경훈 사장(44)은 “처음에는 이곳이 예전 법률사무소 건물인지 몰랐다.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문 대통령님과 이정이 여사님 이름이 있어 알게 됐다”며 “노사모나 재단 관계자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노 전 대통령을 좋아해 온 한 국민으로서 노 전 대통령의 별명을 따 가게 이름을 지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서민을 위해 소신을 펼치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밝혔다. 건물이 유명해지자 일부러 가게를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오 사장은 “일부러 가게를 찾아오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지난달 말에는 여대생 두 분이 봉하마을을 방문했다가 가게를 찾아오셔서 식사하고 가셨다.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출장을 왔다가 가게에 들르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여] |